[데스크라인] 살고 싶은 대한민국

[데스크라인] 살고 싶은 대한민국

 “이민 가고 싶다.”

 아무리 노력해도 가능성이 없을 때, 그래서 삶이 팍팍해질 때 막연히 떠오르는 게 ‘이민’이다.

 노래 잘하고 착하던, 남에게 싫은 소리 한마디 할 줄 모르던 내 친구는 술자리에서 “이민 가고 싶다”는 말을 몇 번 하더니, 기어이 떠났다. 그래서 떠난 곳이 알래스카 어디였던가. 사계절이 뚜렷하고 물 맑고 산이 아름답다는 자랑스러운 ‘금수강산’을 떠나 그는 초여름까지 눈이 덮인 알래스카 어느 곳에서 무역업을 하고 있다. 그는 “참 편하다. 살기 좋다”며 나를 유혹한다. 교통전쟁, 과외전쟁. 사는 게 전쟁터인 대한민국은 사람 살 곳 못 된다며 약을 올린다.

 하지만 안다. 그가 괜찮은 와인을 마시고, 차가운 물에서 잡은 부드럽고 향이 좋은 연어의 육질을 느끼는 그 순간, 한구석에 ‘외롭다’고 울고 있음을. 목구멍에서 저절로 ‘크’ 하는 떨림을 주는 한국 소주의 독한 맛과 왁자지껄한 삼겹살집의 부산스러움을 그리워한다는 것을 나는 안다. 일년 중 절반 정도인 백야현상 때문에 잠을 설치다가, 한국에 있는 나에게 전화해 낡은 추억을 끄집어 내는 그의 마음 속 허전함을 나는 안다.

 불혹의 나이 사십대. 누구 한 번 이민 생각하지 않은 적 있을까. 아이들 공부 때문에, 벌이가 시원찮은 직업 때문에, 한두 번쯤은 이민을 생각하고. 그러다가 살 만하면 잊고, 다시 힘들어지면 떠오르는 것이 이민이 아니던가. 소설가 최인훈의 ‘광장’에서 주인공 이명준이 중립국을 찾으려 했던 것처럼, 이민은 소심한 이 시대 30∼40대 가장의 유일한 일탈이기도 하다.

 ‘이민(移民)’의 사전적 의미는 불량하다. ‘개인이나 집단이 항구적 또는 장기에 걸쳐 자기 나라를 떠나 다른 나라의 영토에 이주(移住)하는 일’을 일컫는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애국을 해야 한다는 것을 수없이 들어온 대한민국 사람으로서 자기 나라를 떠나 ‘다른 나라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입영 전날 밤 ‘이등병의 편지’를 불러 본 사람이라면, 80년대 종로에서 백골단에 쫓기면서 ‘저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를 불러 본 세대라면 더욱 그러하다. 국가와 민족이라는 의식도 알고 보면 통치자 이데올로기의 하나일 뿐인데, 우리는 애국가만 나오면 고개를 숙이는 데 익숙하다. 떠나지 못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단기 4341년 8월, 대한민국은 여전히 갈라져 있다. 남북으로 갈라져 있고, 서울 광화문도 두 쪽으로 갈라져 있다. 건국 60년을 외치는 사람이 있고, 정부 수립 60년을 외치는 사람이 있다. 여의도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일 안 하고 세비를 꼬박꼬박 타가는 높은 국회의원들이 있다. 그러면서도 명분은 항상 당당해 우리를 송구스럽게 한다.

 방학을 맞은 학생들은 학교 다닐 때보다 더 바쁘게 학원을 오간다. 알래스카에 사는 내 친구 아들에게 9시는 한참 잠에 빠져 있을 시간이지만, 한국에 사는 우리 아이들은 같은 시간에 학원으로 출발한다. 그들에게 대한민국을 사랑하라고 가르치기에는 너무 미안하다.

 대한민국에서 착하게 사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는 ‘악으로 깡으로’ 살았다.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대학, 군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악’과 ‘깡’을 배웠다. 그러다 우연히 ‘사람처럼’ 사는 다른 국가와 민족을 보고 그들이 부러워지기 시작했을 뿐이다. 정치인들은 입만 열면 대한민국에 미래가 있다고 하지만, 그 말은 우리에게는 희망과 밥이 되지 못한다.

 건국 60년이든, 정부수립 60년이든 중요하지 않다. 우리에게는 좀 살기 좋은 대한민국이 필요할 뿐이다. 60년 뒤를 살고 있을 우리 아이들이 ‘이민 가고 싶다’는 말을 하지 않는 그런 나라가 필요할 뿐이다. 그게 희망이고, 꿈이었으면 좋겠다.

 김상룡차장 srkim@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