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북한 처녀’ 김설화

 처녀 이름은 설화였다. 김설화(金雪花). 스물 세 살 그녀는 개성공단 ‘봉동관’에 있는 ‘접대원 동무’다. 평양에서 왔다던가. 키는 작았지만 야무지고 당찼다. 예의 바르지만, 할 말을 다하는 ‘모던 걸’이었다.

 그녀는 한국에서 유명하다. 그녀는 2006년 10월 20일 김근태 열린우리당 당의장이 개성공단을 방문했을 때 함께 ‘춤을 춘’ 처녀다. 김 의장은 북한 핵실험 파문으로 시끄러웠던 그날 개성을 방문해 ‘그녀와의 춤’을 췄다. 음식점에서 북한 노래 ‘반갑습니다’에 맞춰 1, 2분간 춤을 춘 김 의장은 돌아와 푸짐하게 욕을 먹었다. 핵무기 실험을 한 다음이라는 시점이 문제였다. ‘집권당 대표가 북한의 핵을 포용하는 것으로 오인될 수 있다’는 지적도 받았다. 그는 유력한 대권후보였다.

 2006년 10월 26일 기자는 그녀를 만났다. ‘춤 파문’ 6일 뒤였다. 중소기업 관련협회 임원들과 함께였다. 개인적으로는 공단 방문도 중요했지만 ‘봉동관’과 ‘춤춘 처녀’가 궁금했다.

 봉동관은 개성공단 공사장 언덕에 있는 허름한 식당이었다. 건물 외형은 공사장 ‘밥집’ 같았다. ‘봉동관’이라는 간판도 페인트로 그렸고 그 간판마저 퇴색돼 있어 을씨년스러웠다. 허름했다. 격에 맞지 않은 조명과 붉은 꼬마전구로 만들어진 한반도 지도, 그리고 간단한 소공연을 할 수 있도록 꾸며진 무대가 전부였다. 바깥은 마당조차 없고 주변에 나무 한 그루 없는 공사판이었다.

 그녀는 일주일 전 입었던 빨간 치마에 노란 저고리를 입고 나와 율동과 춤을 선보였다. 그리고 당연한 듯이 나이 지긋한 일행 중 한 명을 무대로 불러올린 뒤 함께 ‘춤’을 추었다. 정치적인 행동이라기보다 나이 많은 어른을 불러내 흥을 돋우는 그런 퍼포먼스였다. 공연은 상하이나 베이징의 북한 음식점과 흡사했다. 다만 김설화는 남들보다 조금 더 야무져 보이고 당당해 보이는 눈빛으로 좌중을 압도했다. 그녀는 아마도 율동을 이끄는 리더격이었던 모양이다.

 함께 방문한 중소기업 대표들은 ‘김 의장과 춤춘 처녀’에 관심이 쏠렸고 그녀는 웃으면서 사진 몇 장을 함께 찍었다. 한식 요리와 들쭉술, 용성맥주가 반주로 올랐다. 음식은 먹을 만 했다. 음식 먹는 법을 가르쳐 주는 그녀에게 몇 마디 건넸다. 이름이 김설화라는 것도 나이가 스물세 살이었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한국에서 당신이 유명해졌다. 알고 있는가.” “들어서 약간 알고 있다.” “그 사람은 한국에서 유명한 정치가다. 난처해졌다. 어떤 생각인가.” “일없다.” 그게 전부였다. 봉동관을 나서는데 그녀가 말을 건넸다. “기자 선생. 나중에 뵙겠습니다.” 때마침 미루나무로 둘러싸인 2층짜리 허름한 학교에서 남루한 옷차림의 아이들이 쏟아져 나왔다.

 2008년 9월 개성공단은 아직 가동 중이다. 여성 관광객이 금강산에서 사망했고 금강산 관광은 중단됐다. 북한은 다시 폭파한 영변 핵시설 냉각탑을 만들고 있다. 6자 회담도 지지부진이다. 그러나 개성공단 로만손 공장에서 일하는 북한 노동자는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면서 넘어가자’는 격문 아래에서 시계를 조립하고 있다. 아침이면 개성에서 공단까지 수천 명의 처녀들이 자전거를 타고 출근한다. 훼미리마트에서 물건을 파는 북한 처녀들이 친절해지기 시작했고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의 화장기는 우리나라 연예인처럼 진해지고 있다. 북한이 서서히 변하고 있다.

 그때 북한처녀 김설화를 개성공단에서 만났다. 그녀는 나중에 뵙겠다고 했다. 그녀를 다시 볼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중에 만나야 한다’는, 우리가 습관처럼 던지는 그 말처럼 우리는 진짜 만나야 한다. 우리의 통일국어사전에서 ‘만나자’는 말을 하지 않는 그 순간이 통일의 그날임을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 개성공단은 남북이 공존하는 경제 비무장 지대다. 경제는 사상과 이념을 앞선다. 그 곳에서는 지금도 이데올르기를 버린 남과 북의 경제가 만나고 있다.

김상룡기자 sr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