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정책과 현실 사이

[데스크라인]정책과 현실 사이

 ‘중소기업계 올해의 스타는 □□다.’ 정답은 다름아닌 ‘키코’. 중소기업인들이 요즘 주고받는 농담이다. 그런데 말하는 이나 듣는 이나 그다지 웃지 않는다. 키코 유령이 주변을 맴도는지 분위기만 썰렁하다.

 정부는 한 달여 전 키코 피해 업체를 비롯한 중소기업에 8조원대의 유동성 지원 대책을 내놓았다. 은행을 통한 선별 지원 정책이다. 금융당국은 중소기업을 잘 지원하는 은행에 경영평가 가산점도 주겠다고 했다. 실적 제시도 요구했다. 대통령까지 나서 연일 은행의 중소기업 대출을 독려했다. 그런데 정작 자금 지원을 받았다는 중소기업을 찾아보기 힘들다. 받기는커녕 대출 회수 압력이나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하소연도 나온다. 왜 사정이 나아지지 않을까.

 은행으로선 경영평가 가산점이라는 인센티브를 얻는 것보다 부실 위험이 큰 중소기업 대출 증가로 인한 신용등급 하락을 막는 게 더 급하다. BIS비율을 높이려고 발버둥치는 은행들이 중소기업들의 딱한 사정이 눈에 들어오겠는가. 은행의 건전성 확보와 중소기업 대출 확대는 현재 양립하기 힘들다.

 이런 비판이 빗발치자 당국은 은행의 원화 유동성 비율을 낮추고, 새 BIS협약인 바젤Ⅱ 의무도입 시기를 늦췄다. 기보와 신보의 보증 한도를 늘렸다. 국책은행을 통한 은행의 주택담보대출을 매입하는 방안도 추진 중이다. 늦게나마 다행이다. 그래도 부족하다. 자선사업가도 아닌 은행을 움직일, 현실적인 조치를 정부는 더 내놓아야 한다. 그래야 한 달 전에 건설 유동성 지원 정책을 마련하고, 1차 부도설이 돌자 추가 지원책을 발표했음에도 결국 부도를 막지 못한 신성건설 사례가 재연되지 않는다. 은행이 부담 없이 대출할 수 있게 했는데도 회피한다면 진짜 ‘미필적 고의’ 책임을 은행에 지울 수 있다.

 자금난 말고도 중소기업을 괴롭히는 게 낮은 납품단가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최근 ‘쌈박한’ 해결책을 내놓았다. 납품단가 조정협의 의무제다. 한마디로 원가 상승요인이 생겨 납품단가를 올려야 할 때 대기업이 이를 회피하지 않고 성실하게 협상에 응하도록 하는 제도다. 원래 원가연동제를 적용하자는 주장이 있었지만 시장원리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에 따라 이 제도를 도입했다. 그런데 과연 실효성이 있을까.

 대기업과 중소 협력사의 관계는 이른바 갑-을 관계다. 전속거래 관행 등으로 ‘갑’이 ‘을’의 생사여탈권을 쥔다. “싸게 안 줄래, 그러면 거래 끊을 수밖에 없지 뭐.” 거래가 중단돼 아쉬운 건 늘 ‘을’일 뿐이다.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낮은 납품단가에 응해야 하는 처지다. ‘갑’이 협상을 회피한다고 하도급분쟁조정협의회에 조정을 신청할 강심장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아직 만들어지지도 않은 법에 중소기업인들이 냉소를 보내는 이유다. 근본적이며, 현실적인 해결책은 중소기업 스스로 ‘갑’과 협상력을 가질 만큼 실력과 몸집을 키울 수 있게 지원하고, 생태계를 만들어주는 일이다.

 지금처럼 긴박한 상황에선 임기응변식 대책도 필요하지만 이것만으로 해결할 중소기업 문제는 없다. 대책이 많고 화려할수록 현실과 더 멀어진다.

 “유동성 지원이나 하도급 대책이나 그다지 피부에 와닿지 않습니다. 겉만 반드르르하지 실효성이 없어요. 정부 말이죠, 그냥 조용히 도와주면 안 될까요. 소리만 요란해 괜한 기대만 갖게 하고….” 자금난에다 납품단가 압력까지 시달리는 한 중소기업인의 푸념을 듣자 문득 10년 전 사라진 국정원훈이 떠오른다.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

신화수기자 hsshin@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