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트라우마 시대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새벽 쓰린 가슴 위로/차거운 소주를 붓는다/아/이러다간 오래 못 가지/이러다간 끝내 못 가지.’

 박노해 ‘노동의 새벽’을 읽었다. 숨 죽이며 읽었던 ‘노동의 새벽’이다. 마흔 중반을 넘어서는 나이, 머리 곳곳에 흰머리가 나기 시작한 2008년 12월, ‘노동의 새벽’을 다시 읽는다. 7080 세대에게 삶은 전쟁이었다.

 그가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가 무기징역을 받았다든지, ‘전향’을 했다든지, 시집이 금서였다든지 하는 과거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노동의 새벽’에서처럼 ‘전쟁 같은’ 노동이,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부어야 할 만큼 고통스런 현실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는 게 중요하다. 인천 남동공단에도, 서부 주물공장에도, 구로 디지털밸리, 테헤란밸리에도, 하이닉스반도체 공장에도, GM대우 공장에도 전쟁 같은 현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노동자’만의 전쟁이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전쟁 같은 현실은 비단 노동현장뿐 아니라 사장의 얇은 지갑과 회사의 빈 금고, 가정의 소박한 식탁에도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가락동시장에서 새벽에 만났던 박부자 할머니의 5000원짜리 시래기 좌판에도 있다.

 회사 직원은 구조조정과 임금 삭감을 두려워하고, CEO는 주문량이 떨어져 생산시간을 단축해야 하고 이집저집 돌다가 들어온 100만원짜리 약속어음이 무섭다. 직원들에게 해고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자꾸 악몽이 떠오른다. 주부는 학원을 끊어야 했고, 아이들 간식비마저 줄인다. 부도를 맞은 중소기업 사장은 휴대폰을 끊고, 한 달째 잠적 중이다. 메신저에 ‘당신의 잘못이 아니며, 시대의 잘못이다. 재기를 위해서만이라도 휴대폰을 켜 놓으라”며 위로하는 친구의 음성메시지에도 그는 답이 없다.

 그때였던가. 2001년 겨울, 나는 대우자동차 정문에 서 있었다. 노란 봉투에 담긴 해고 통지서를 받은 공장직원들이 모여들었고, 시위가 시작됐다. 그날 인천에는 함박눈이 푸짐하게 내렸다. 1700명이 회사를 떠났다. 지난 1일 인천 부평구 청천동 GM대우자동차 본사 부평 2공장은 내년 1월까지 35일간 공장 가동을 중단했다. 부평 1공장도 이달 22일 가동 중단에 들어간단다. 주변 상가는 벌써 을씨년스럽다. 그해 겨울처럼.

 과거의 기억은 반드시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전쟁을 겪었다면 더 그렇다. 전쟁은 모든 것을 파괴하는 그 잔혹성보다, 육체와 정신에 생채기를 남긴다는 점이 무섭다. 그 생채기를 만지거나, 볼 때마다 우리는 충격과 공포를 느낀다. 전쟁의 후유증이다. 그것을 트라우마(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라고 한다. 대한민국은 앓고 있다. 식민지 통치와 6·25 전쟁, 70·80년대의 혹독한 노동과 폭력, 90년대와 밀레니엄의 잔인한 IMF 구제금융시절을 거치면서 우리는 모두 트라우마세대가 됐다.

 이주 금요일, 이 대통령은 당선 1주년을 맞는다. 당선 당시 50%에 가까운 득표율을 몰아줄 만큼 대한민국 경제 대통령이 되기를 국민은 갈망했다. 기대는 컸다. 편 가르기를 끊어내고 선진국처럼 잘살아보기를 빌고 빌었다.

 불과 1년, 국민의 기대는 많이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에 이름도 낯선 트라우마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김상룡 경제교육부 차장 srkim@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