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미국인 친구가 몇 있다. 친해지면 선물을 주곤 했다. 비싸 봤자 2만, 3만원짜리 공산품이다. 무척 고마워 하는데 한국산이라면 더욱 그렇다. “오, 한국산이네!”라는 감탄사 속에 ‘네가 내게 신경 많이 쓰는구나’라는 생각이 묻어나온다. 중국·대만·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산 제품이 판을 치는 미국에서 한국산은 일제만큼 고급 대접을 받는다.
새집을 장만한 미국인들은 일제보다 한국 전자제품을 산다. 삼성 TV나 LG 냉장고, 세탁기, 에어컨이다. 삼성과 LG 휴대폰에도 열광한다. 우리가 오래 전에 소니 TV나 GE 냉장고, 밀레 세탁기, 모토로라 휴대폰에 보였던 반응 그대로다. 미국인이 아는 코리아는 김정일·야구·삼성·LG뿐이라는 우스개가 나올 정도다. 우리나라 전자 제품이 코리아의 이미지를 이렇게 바꿔놓았다.
이미지는 좋아지는데 정작 ‘메이드 인 코리아’는 줄어들고 있다. 수출 1번지 구미공단의 수출이 사상 처음으로 감소를 기록했다. 글로벌 경기 침체에 따른 생산량이 감소하기도 했지만 해외 생산이 그만큼 늘어났다. 해외 생산의 본질은 가격 경쟁력이다. 우리나라보다 더 낮은 인건비와 물류비를 찾아 중국·인도네시아·베트남으로 나갔다. 현지 인건비도 오르고, 환율 등의 변수로 효과가 예전같지 않지만 생산기지 해외 이전은 당분간 이어질 것이다.
남용 LG전자 부회장이 지난 9일 곱씹어볼 만한 발언을 여럿 했다. 그는 열 명이 할 일을 열두 명이 하는 ‘잡 셰어링’을 난센스라고 하면서 생산성을 높여 남은 인력을 다른 사업에 투입해 새 가치를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부품과 서비스 구매 비용도 아직 절감할 것이 많다고 했다. 특히 귀에 솔깃한 것은 중국 톈진 에어컨 공장의 생산량 일부를 한국으로 돌리기로 했다는 발언이다. 원화가치 하락으로 중국 공장의 유지비용이 높아져 굳이 중국에서 생산할 이유가 없어졌다는 설명도 이어졌다.
해외 생산의 이점인 가격경쟁력도 언젠가 한계가 도달한다. 현지 인건비와 물류비도 어느 순간 우리나라만큼 오른다. 부품 소싱도 해외가 우리나라보다 그다지 썩 좋은 것도 아니다. 가격경쟁력만 보고 해외 생산하는 전략도 이제는 수정해야 한다. 확실한 브랜드와 품질이 있다면 이미지가 좋은 한국산이 더 유리할 수 있다. 경기 침체로 각국에 보호무역주의가 팽배해지면서 더욱 그렇다. 스스로 발목을 잡을 기술 유출도 생각해야 한다.
LG전자가 국내로 돌릴 생산량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원화가치가 오르면 다시 해외로 나갈 수 있다. 정책 당국은 이 생산량이 어떤 상황변화에도 불구하고 더 줄지 않도록, 되레 더 늘어나도록 해야 한다. 해외보다 우리나라에서 생산하는 게 더 좋도록 기업 환경을 개선해야 한다는 얘기다. 불필요한 규제 혁파도 좋고, 고용 창출에 따른 파격적인 인센티브도 좋겠다.
정부는 틈만 나면 기업하기 좋은 나라로 만들어 글로벌 기업과 연구소를 유치하겠다고 했다. 일본 부품업체를 위한 전용 공단도 만들 계획이다. 글로벌 기업의 한국 투자를 환영한다. 그런데 열 개의 글로벌 기업이 오는 것보다 한 기업이라도 해외 생산기지를 다시 국내에 들여오는 게 더 의미 있다고 본다. 이것이야말로 정부 기업 정책의 성패를 가늠할 시금석이기 때문이다. LG 에어컨이 첫 출발점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신화수 취재담당 부국장 hsshin@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