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기 정권의 산업 어젠다가 무엇인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무엇을 어떻게 따다 붙여서 당의(糖衣)를 입힐지, 그 시나리오도 궁금하다. 계속 되풀이되는 일이지만 그때마다 현혹되는 몽매의 극치는 자괴를 넘어 자학에 이를 지경이다. 언제나 제 속도로 움직이는 산업을 놓고 바뀌는 정권마다 코에 찍고 뺨에 바르고 난리다. 현실과 상관없이 정권의 치적에 산업이 이용돼왔다. 산업이 정권의 시녀도 아닌데 시녀 다루듯 한다. 하지만 결코 ‘5년짜리 산업’은 없다.
‘질 좋은 성장’을 내걸었던 참여정부의 산업 정책은 결과물 하나 없는 헛구호에 그쳤다. 질이 좋기는커녕 경기 침체의 바람이 불자마자 가을 낙엽 떨어지듯 실업자가 속출했다. ‘질’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안정된 성장을 기대한 국민에게 실망감만 안겨준 정책이었다. 불신과 원망만 안겨준 정권은 결국 국민의 심판을 받아 퇴출됐다.
그런데 ‘녹색성장’을 기치로 내걸었던 이번 정부도 비슷한 조짐을 보이고 있다. 모든 정책 앞에 습관성 ‘그린’을 붙이더니 정작 주력은 4대 강 개발이다. 경제의 흐름을 위해 소비 심리를 살리자고 했더니 분양 안 된 아파트의 양도세 감면부터 서두른다. 반만년 유유히 흘러온 강을 대운하로 바꾸고 여기에서 일자리를 창출해낸다고 한다. 건설사 몰아주기식 경기 부양도 아닐 텐데 건건이 ‘삽질’이다. 아직도 경제의 기초체력은 건설이라는 구시대적 ‘신화’에서 벗어나지 못한 느낌이다. ‘부동산 불패’를 정책으로 보여주려는 의도로까지 보인다.
‘건설 올인’ 정책은 ‘디지털 뉴딜’에 그대로 나타난다. 일자리 창출과 중소기업에 혜택이 크다고 인정하는 사업의 추경예산이 3분의 1로 줄어들었다. 관련 정부부처 공무원마저 “실·국장 심지어 장관까지 나서 재차 설명하지만 재정부의 관심은 오로지 4대 강 살리기와 같은 토목·건설사업에만 집중된 느낌”이라며 “내부적으로 이번 추경에 아예 발을 빼자는 격앙된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이 정도면 ‘정책 따로 구호 따로’의 전형이다. 말 그대로 ‘그린’은 산업 앞에 붙는 접두사일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이럴 바엔 차라리 ‘건설 성장’ ‘삽질 성장’을 기치로 내거는 게 맞을 법했다.
산업 현장 곳곳에선 위기를 기회로 만들자는 목소리가 높다. 기초기술에 취약점을 보여왔던 한국의 산업 구조를 바꿀 절호의 기회라는 흥분도 잔잔하다. 이 기회에 집중적인 투자로 대일 무역 역조의 주범이었던 부품·소재산업을 살려보자는 의기도 충만하다. 그동안 미국·일본·독일에 명함도 못내밀었던 소재산업에서 작지만 ‘메이드 인 코리아’의 목소리도 내고 있다. 소재 없는 부품이 없고, 부품 없는 완성품은 없다. 결코 5년짜리 산업이 아니다. ‘질 좋은’을 붙여도 좋고 ‘그린’을 붙여도 좋다.
미래 산업의 목표는 상용기술을 개발해 종속되지 않는 산업 구조를 갖는 데 있다. 완공 후면 다시 실업자가 되는 고용이 아니라 우리만의 기술로 대대손손 자부심 갖고 일할 수 있는 일자리가 필요하다. 그래서 당장은 어렵지만 ‘삽질’보다 불을 밝히며 연구개발하는 데 투자해야 한다.
무엇보다 산업 기술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기업에 정부가 ‘누’가 돼선 안 된다. 지원을 못 해줄 망정 기를 꺾지 말아야 할 것 아닌가. 예산을 담당하는 정부부처 역시 현장을 담당하는 공무원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5년마다 바뀌는 정권에 코드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50년, 500년을 바라볼 산업에 투자하는 것이 이 나라 공무원의 자세다.
이경우부장 kwlee@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