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대덕의 인연은 각별하다.
인연이라기보다 과학기술에 대한 애정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짝사랑’이다. 대통령이 특정 지역을 자주 찾기 쉽지 않은데도 대덕만큼은 예외였다.
노 전 대통령은 대통령 후보시절인 지난 2002년 10월, 처음 KAIST에 왔다. 청와대 과학기술비서관 신설과 이공계 우대 정책, 연구개발 투자 증액, 연구중심제(PBS) 및 인센티브 개선 등 과학기술 관련 공약을 무더기로 쏟아냈다. 당시로선 모두가 파격이었다. 이날 처음 정부출연연구기관장 간담회도 마련됐다. 그러나 당시 대덕은 그를 그다지 반긴 편은 아니었다. 당시 간담회에 참석했던 기관장은 고작 세 명이었다. 그나마 출연연기관장협의회장을 빼면 두 명만이 참석했다. 또 기관들은 ‘잘나가던’ 상대 후보에 찍힐 것을 우려했던지 강연 공간을 선뜻 내주지도 않았다.
노 전대통령은 그해 12월 한 번 더 찾아왔다. 대덕의 과학기술인 모임인 대덕클럽 초청으로 와서 ‘과학기술정책 중심의 국정 운영’을 약속하며 ‘출연연에 민영화는 없다’는 말을 던져 놓고 갔다. 나중에 그 약속은 지켜졌다. 대통령에 당선돼 취임하기 바로 직전에 다시 찾았다. 후보 시절에 받았던 푸대접도 싹 잊은 듯했다. 취임 이후에도 다섯 번이나 대덕을 다녀갔다. 과학기술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는 증표다.
2003년 4월 21일 제36회 과학의 날에 KAIST 강당에서 기념행사를 갖고 타임캡슐을 묻었다. 과거 대통령이 대덕을 찾을 때면 삼엄한 경계와 보안이 뒤따랐지만 이날은 달랐다. 내리 5년간 편했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모두가 열광했다. 20여분 행사에 박수가 10여회 터져 나왔다.
노 전 대통령은 같은 해 말 대덕을 또 찾았다. 대덕연구단지의 연국개발(R&D) 특구 지정 기념식을 위해서였다. 이 자리에서 그는 대덕이 1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의 주역이 돼 주길 기원했다. 이듬해에는 역대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KAIST 학위 수여식에 참석했다. 이날 그는 “우수 과학기술인을 정부가 평생 지원해야 한다”는 말로 박수세례를 받았다. 2004년 10월은 더 잊을 수 없다. 과학기술부총리 체제를 출범시켰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는 2005년에 ETRI를 찾았다. 이날 그는 “대한민국 과학기술 1번지인 대덕이 세계적인 혁신클러스터가 되도록 확실하게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대전 시민의 1인당 소득이 5만달러, 10만달러는 돼야 전국이 3만달러 시대가 된다”는 말도 남겼다.
2006년에는 한국생명과학연구원을 방문했다. ‘미래 바이오혁신전략보고회’를 열고 범부처적인 바이오 육성 의지도 드러냈다. 미래의 성장동력이 ‘바이오’라는 것을 꿰뚫어봤다. 마지막 방문은 지난 2007년 9월이다. 국가핵융합연구소의 핵융합 실험장치인 ‘KSTAR’를 둘러봤다.
2년이 흘러 지금 대덕은, 과학기술계는 ‘선진화(구조조정)’라는 칼날 위에 서 있다. 매년 10조원의 R&D 예산을 투입하고 이공계 사기 진작에 온갖 ‘공’을 들였던 투자는 간 곳이 없다. ‘짝사랑’의 흔적도 모두 사라졌다. 그러나 오늘도 대덕은 아무 말이 없다.
박희범 전국취재팀장 hbpark@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