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가 가장 빠르게 회복 중이다.”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스턴경영대학원 교수의 말이다. 그는 지난해 미국발 경제위기를 정확히 예고해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제학자로 평가된다. 거침없는 쓴소리에 ‘닥터 둠(Doom)’이란 별명도 얻었다. 그런 그가 “한국이 10년 전 외환위기를 극복해낸 경험을 동력삼아 지금의 위기를 슬기롭게 대처한다”며 한국경제 희망론을 내놨다. 그간 우리의 가슴을 짓눌러온 불안감을 걷어내주는 희망의 메시지였다. 하지만 그는 단서조항을 하나 달았다. 더욱 적극적인 구조조정과 인수합병을 통해 효과적이고 경쟁력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선결조건을 내걸었다.
OECD 회원국 중 유일하게 한국만 플러스 성장했다. 월간 사상 최대의 무역흑자, IT기기의 세계 시장 점유율 상승. 지난 1분기 우리나라의 성적표다. 우리의 영원한 경쟁국인 일본이 -4% 성장으로 헤매는 상황에도 우리는 플러스 성장을 기록했다. 올해 들어 미국시장에서 도요타자동차의 판매가 36% 줄어든 사이 반대로 현대차는 4.9% 늘었다. 판매액 기준으로 지난 분기 세계 TV시장에서는 삼성전자와 LG전자가 소니를 3위로 밀어냈다. 기분 좋은 결과다. 그러나 게운치 않다. 이유는 좋은 실적의 원인이 기술력이 아닌 환율착시 현상에 있기 때문이다.
엔화강세 현상으로 일본 기업의 수출경쟁력이 나락으로 치닫고 있을 때 우리는 정반대로 환율 덕에 짭짤한 수익을 챙길 수 있었다. 지난해 3월 초 900원대던 원달러 환율은 올해 3월 초 1570원까지 치솟았다. 3만달러짜리 자동차 한 대를 팔면 지난해 3월엔 2700만원을 벌 수 있었다면 올 3월엔 4710만원이 손에 들어왔다는 얘기다. 다시 말해 차액인 2010만원만큼 차 가격을 인하하거나 홍보 및 마케팅 비용으로 지출할 수 있는 여력이 생겼다. 우리와는 정반대로 일본은 엔화강세 현상 탓으로 매출 자체가 급감했으니 ‘100년 만의 최악’이란 말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만일 일본의 상황이 우리에게 닥쳤다면 결과는 어땠을까. -4% 성장 기록 하향 돌파는 물론이고 도산기업이나 구조조정 기업이 수두룩하게 나오지 않았을까. 지금 일본 기업들은 초비상이다. 평생직장 개념을 주창해오던 대부분의 기업이 감원에 나서고 있고, 경영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공장을 통폐합하거나 돈 안 되는 사업을 과감히 정리한다. 반면에 우리 기업은 상대적으로 느긋하다. 오히려 정부가 기업의 구조조정을 종용하는 상황이다.
불과 최근 2개월 사이 원달러 환율은 1200원대 중반으로 추락했다. 우리 수출기업은 앉아서 매출의 20% 이상을 까먹은 셈이다. 수출 산업엔 먹구름이다. 이게 끝이 아닌, 시작일지도 모른다. 사정이 이러니 현대차도 이제서야 ‘경기불황에 우리도 예외일 수 없다’는 위기의식을 전사에 전파하고 나섰다. ‘닥터 둠’은 우리나라가 1분기 세계 위기 상황에서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외환위기 이후 경제정책·시스템을 잘 바꿨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과연 그 약발의 유효기간은 언제일까. 일본이 주춤한 사이 환율 덕에 시장 점유율 격차를 줄였다고 자만하고 있는 건 아닐까. 위기는 분명 또 다른 기회를 제공한다. 다만, 그 기회는 준비하는 자에게만 주어진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최정훈 국제부 차장 jhchoi@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