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이 지난 30년간 기술개발로 국내에 끼친 경제적 파급효과는 자그마치 104조5725억원이나 된다.
지난 1986년 전전자교환기(TDX) 개발을 시작으로 1988년 D램으로 반도체 산업의 기틀을 다졌고, 1996년에는 CDMA로 대박을 터뜨렸다. 2004년에는 와이브로와 지상파 DMB, 최근에는 3.6 급 제4세대 무선전송시스템을 세계 처음 개발해 세계 이동통신 시장을 선도하는 기틀을 놨다. 사실 이 기술개발에 들어간 예산은 경제적 파급효과의 25분의 1에 불과한 4조3635억원이다.
최근의 글로벌경제 위기 아래 우리나라가 세계 시장 점유율을 확대해 가며 선전하는 품목을 보면 메모리와 디스플레이, 휴대폰 등 모두 IT 제품이다. 지난 2008년 1분기 대비 올해 1분기 시장 점유율을 보면 메모리가 42.7%에서 52.6%, 디스플레이 40.5%에서 52.5%, 휴대폰이 23.8%에서 27.9%로 각각 늘었다.
인력밖에 없던 자원빈국의 우리나라가 세계 1등 제품을 IT 분야에서 배출하는 기반을 마련하게 된 것에 ETRI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한다.
그러나 요즘 들어 IT산업의 생산과 고용, 소득 창출 역할이 떨어지면서 성장 견인 효과가 갈수록 저하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IT는 여전히 선진국 대비 70∼90% 수준이고, 경쟁국의 과감한 IT 인프라 투자 등으로 우리나라 위상이 위태롭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그동안 IT 성장동력의 밑거름을 제공했던 ETRI마저도 새로운 정체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ETRI가 융합기술 트렌드에 따라 자동차와 항공·의료·조선·국방 등에 첨단 IT를 접목하는 기능을 수행하면서 IT R&D를 주도하는 기관에서 이를 지원하는 보조적인 기관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예전에는 ETRI 자체 R&D 비중이 80∼90%에 달했으나 지금은 10∼20%에 불과하다는 것. 뒤집어보면 R&D를 수행하기보다는 기업을 지원하는 기관 이미지로 고착화되고 있다는 진단이다.
“모두가 ETRI IT고도화 전략의 부재가 초래한 결과다. 특히 돈 되는 것에 급급해하고, 정부가 시키는 대로만 했다. ETRI, 나아가 우리 나라는 IT 원천기술 개발에 소홀히 한 대가를 반드시 치를 것이다.”
정부출연연구기관 정책 관계자의 전언이다. 최근에는 ETRI를 쪼개 민영화할 것이라는 근거도 없는 소문마저 흘러다니면서 연구 분위기를 뒤흔들어 놓았다.
지금의 컴퓨터보다 수천배 빠른 양자 컴퓨터나 IT 기반의 바이오컴퓨터 등을 개발할 자원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슈퍼 컴퓨터 제작이나 몸속에 들어갈 5∼6세대 이동통신 기술 개발, 가상현실 교육 콘텐츠 등도 모두 IT 고도화로 ETRI가 수행해야 할 플랫폼들이다. 특히 ETRI가 융합기술의 주도권을 찾아야 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최문기 ETRI 원장의 말처럼 ETRI가 제2의 르네상스를 맞이하려면 BT나 NT 등의 원리와 기반을 바탕으로 IT를 새로 세우는 IT 고도화 전략부터 다시 만들어야 할 것이다. IT강국 코리아의 재현은 결코 멀리 있지 않다.
전국취재팀장 박희범 hbpark@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