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인의 영원한 선배로 추앙받고 있는 고(故) 최형섭 전 과학기술처장관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다.
“학문에는 거짓이 없어야 한다. 부귀영화에 집착해서도 안 된다. 시간에 초연한 생활 연구인이 돼야 한다. 직위에 연연하지 말고, 직책에 충실해야 한다. 아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을 반성해야 한다.”
정부출연연구기관 연구원이 갖춰야 할 기본 덕목에 대한 고인의 가르침이다. 그러나 치열한 생존 경쟁을 펼치고 있는 사람들에겐 ‘쇠귀에 경 읽기’일 뿐이다.
지난주 우리나라 출연연의 원조인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기관장에 재미동포 한홍택 박사가 선정됐다. 이를 두고 과학기술계에서 차기 출연연 기관장의 필수조건이 풍부한 해외경험은 물론이고, 해외동포여야 한다는 말이 돌며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모두가 기관장 임기 및 덕목과 관련이 있다. 하고 싶은 사람은 많고, 뜻대로 되지는 않는 것이 이유다. 최근 KAIST에서 내년 7월 임기가 만료되는 서남표 총장의 연임 여부를 놓고 벌써부터 설왕설래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실 출연연은 정부의 기관 선진화 대상기관 중 ‘기타 공공기관’으로 분류되며 정부기관의 ‘끝자락’에 붙어 있는 ‘보잘 것 없는’ 조직이기도 하다.
MB정권이 출범한 이후 참여정부 시절에 임명된 기관장은 대덕에선 지금 단 2명만이 남아 있다. 물갈이를 할 만큼 한 셈이다. 그동안 KAIST 등을 통해 외국인 수장을 시험해온 교육계에는 회오리 바람이 불었으나 내부 반발 등을 고려해볼 때 ‘성공작’이라고 말하기는 아직 이르다. 한국의 R&D 풍토를 체득할 때쯤이면 임기가 끝나버리기 때문이다.
출연연 기관장도 다를 바 없다. 훌륭한 기관장을 선발하기 위한 서치 커미티도 좋고, 능력 있는 인사의 추천도 좋지만 3년이라는 한정된 임기가 문제의 시발점이 되고 있다. 1년간 업무파악에 보직자 인선과 조직개편, 나아가 인사 다니다 보면 얼떨떨한 상태에서 그해 10월에 국정감사를 받아야 한다. 어영부영 1년이 다가고, 그러다 보면 기관평가에서 낙제받기 일쑤다. 아무리 잘해도 출연연 원장 1년차는 그냥 총알받이라는 말이 있다. 평균점수만 받아도 선방했다고 말한다.
임기 2년차에는 본격적으로 소신 있는 정책을 펴려 하지만 잘 되지 않는 시기다. 윗선, 즉 정부와 연구회 눈치도 봐야 하고 괜스레 눈총받을까봐 몸조심하는 기간이다. 임기 말인 3년차가 되면, 원장들은 연임 가능성이라는 ‘진흙밭’에서 헤어나오질 못한다. 소탈하게 본인의 업무와 전공으로 되돌아가지 못하고 연임을 꿈꾸게 된다. 연임에 실패하게 되면 연구자로서의 수명까지 끝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통령과 임기를 같이 시작해 마치자는 대안이 제기되기도 한다.
독일의 연구회는 이사장 임기가 종신제다. 분명, 철저한 학문적 업적과 개인 됨됨이 검증만 수년 동안 이뤄져 이를 통과한 수장은 큰 과오가 없는 한 자신이 사표낼 때까지 연구회를 이끈다.
기관장은 임기 3년의 계약직이다. 연임을 위해 전횡을 휘두른다면 피해 보는 것은 20∼30년간 일할 연구원들이다. 궁극적으로 국민이 피해를 본다. 과학기술계 및 원자력계 정책통으로 활약하다 최근 기관장에서 물러난 이헌규 전 원자력 통제기술원장의 말이 새삼 떠오른다. “사람은 지혜로운 인물이 돼야 하는데, 욕심이 지나치면 그 지혜를 가리게 된다.”
박희범 전국취재팀장 hbpark@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