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사부아 지방에서 제분업자의 아들로 태어나 스물 다섯 살 때인 1872년 가죽제품 작업장 럭셔리 하우스 오픈.”-시몽 티소 듀폰
“1913년 이탈리아 밀라노에 가죽제품과 액세서리 부티크 ‘인포트 숍’ 오픈. 이후 손녀 미우치아 프라다가 제2 창업.”-마리오 프라다
“이탈리아 피아첸차에서 태어나 볼로냐 의과대학 중퇴. 이후 에마누엘 웅가로 밑에서 패션 디자인너 수업 후 1974년 아르마니 브랜드 창업.”-조르조 아르마니
우리나라 휴대폰 3사가 제휴한 명품 브랜드의 창업자들이다. 내 돈으로 살 수 없어 그렇지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본 이름이다. 모르긴 몰라도 이들은 상당한 라이선스료를 받는다. 판매 제품에 따라 일정 수익을 나눌 것이라는 점은 쉽게 짐작이 간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두 사람은 이른바 ‘갖바치’다. 갖바치는 조선시대 가죽신을 만들던 기술자인 화혜장(靴鞋匠)으로 양반-중인-상민-천민으로 이어지는 조선시대 신분 계급의 맨 아래를 차지했던 사람들이다.
오죽하면 ‘갖바치 내일 모레’라는 속담이 있을까. 일부러 물건을 늦게 만들어 약속한 기일을 자꾸 미룰 때 쓰는 말이다. 이들이 얼마나 경멸을 받았으면 이렇게라도 반발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명품은 비싸다. 또 비싸야 명품 대접을 받는다. 사실 따지고 보면 명품이나 잘 만든 짝퉁이나 별 차이 없는 때가 많다. 그래도 사람들은 진짜 명품이면 사족을 못 쓴다. 명품 가게에서는 비싼 이유를 제품에 장인정신이 들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실 장인정신은 브랜드 값어치의 다른 이름인지 모른다.
우리나라에 아직 장인의 이름을 딴 명품이 있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다. 물론 한지의 장인, 금속활자의 장인, 벼루의 장인 등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뛰어난 기술을 갖고 있지만 대중화하고 글로벌화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때가 대부분이다.
문제는 가까운 시일에 한국산 장인을 브랜드로 한 명품이 나오기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장인으로 살기에는 현실이 너무 팍팍하다. 현재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는 전수 활동비로 월 100만원, 전수조교 40만원, 전수 장학생에게 12만원을 지급한다. 무형문화재 전수가 최소 10∼20년은 걸린다는 현실을 볼 때 이 액수는 턱없이 부족하다. 결국 개인의 인생을 희생하지 않고는 이룰 수 없는 일이다.
해방 전만 하더라도 우리 대장간에서는 지금의 독일 칼 ‘칼슈미트’나 일본 공구 ‘박스 마스터’보다 더 좋은 물건을 만들었다. 그러나 산업화 과정에서 장인을 무시하고 제대로 대접해 주지 않아 지금은 학생들 교과서에만 남거나 겨우 명맥을 유지할 뿐이다.
우리 곁에는 중요무형문화재 42호 악기장(樂器匠) 고흥곤씨, 60호 장도장(粧刀匠) 한병문씨, 77호 유기장(鍮器匠) 이봉주씨, 93호 전통장(箭筒匠) 김동학씨, 110호 윤도장(輪圖匠) 김종대씨 등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우직한 뚝심으로 ‘무소의 뿔’처럼 외길을 가는 장인들이 있다.
지금 우리나라 휴대폰·TV·에어컨·세탁기 등 IT제품이 세계를 누빈다. 이들 제품은 모두 일반 소비자가 대상이다. 여기에 우리 장인들의 혼이 담긴 전통 기술이 곁들여진다면 아시아의 작은 나라 대한민국을 알리는 또 하나의 전도사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홍승모 생활산업부장 smh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