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감을 안 받으니 좋네요.” 얼마 전 정부 산하 기관장 자리 지원을 놓고 고민하다가 기업으로 간 고위 공무원의 말이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그는 미련이 있는 듯했다. 요즘 공무원 사이에는 기관장 경쟁도 치열하다. 하고 싶다고 되지 않는다. 눈치없이 지원했다가 떨어지면 가족은 물론이고 후배에게도 낭패다. 국감을 안 받아 좋다는 얘기는 마치 ‘여우와 신 포도’로도 들린다. 설령 그럴지라도 가장 먼저 이유로 대는 것을 보니 공직자에게 국감은 정말 골칫거리인 모양이다.
국회는 국정감사를 실시해 국정이 공정하게 집행되는지를 감시한다. 입법, 예산심의와 함께 국회의 중요한 권한이다. 제헌헌법부터 명문화돼 생겨났다가 유신 때 부패와 국정 저해를 이유로 사라졌다. 5공화국 국정조사, 6공화국 국정감사로 부활했다. 국감은 군사정권 시절 누적된 온갖 비리와 환부를 들춰내면서 방만한 국정을 바로잡는 데 크게 기여했다. 공무원이 납세자의 눈치를 보게 되면서 예산을 허투루 쓰거나 정책을 제 맘대로 펴지 못하게 됐다. 국감은 무엇보다 억눌린 압제 속에 수십 년간 꽉 막힌 국민 속을 후련하게 뚫어줬다. 국민의 관심이 집중되면서 국감은 정치 질서도 바꿔놓았다. 신진 정치인들이 거물급으로 성장하는 지렛대 구실을 했다. 고 노무현 대통령과 이해찬 전 총리가 바로 원조 국감 스타다. 초선으로 일약 스타 정치인으로 발돋움했다. 그때 같지는 않지만, 지금도 해마다 제2의 노무현, 이해찬이 국감장에서 나온다. 이처럼 국감은 국정 감시라는 본연의 목적 외에 긍정적인 측면이 많다.
부작용도 있다. 업무를 처리해야 할 공무원이 줄줄이 장차관을 따라 국감장을 지키는 것은 늘 볼썽사납다. 자료 요구도 엄청나다. 이것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해도 근거 없는 폭로와 비방이 너무 잦다. 여당은 행정부처 감싸기로 본질을 흐린다. 이번 국감은 보궐 선거 직전이어서 정략 국감으로 갈 가능성이 높다. 이런 것까지 ‘포괄적인’ 정치 행위라고 치자. 민간인, 그것도 기업인을 왜 이렇게 많이 국감에 출석시켜야 하는지 모르겠다.
이번 국감에도 기업인이 어김없이 출석한다. 특히 IT 기업인이 많다. 이동통신사업자는 단골손님이 된 지 오래다. 인터넷 포털과 IT서비스 업체도 출연한다. 중소기업인으로 출연진이 넓어지는 추세다. 기업인을 부르는 상임위원회도 다양해졌다. 국회가 의정활동을 위해 기업인의 목소리를 듣겠다는 것, 나무랄 일은 아니다. 문제는 증인석에 앉은 기업인을 마치 죄인처럼 취급한다는 점이다. 국감장은 정책 당국의 잘잘못을 가리는 곳이다. 정책과 관련 있다고 기업인을 불러놓고 창피를 주는 자리가 아니다. 정책 비리와 직접 연루된 기업인일지라도 이 사람은 국감장이 아닌 법정에 서야 할 사람이다.
국감 철이 되면 일부 대기업 CEO들이 예정에 없는 해외 출장을 간다. 대외담당 임원은 여의도에 살다시피한다. 경제전쟁 속에 바쁜 시간을 내 출석한 기업인은 하릴없이 국감장에서 시간만 죽인다. 기업의 힘으로 경제 선진국이 되고 이를 발판으로 ‘G20 정상회의’까지 유치한 코리아에서 매년 되풀이되는 해프닝이다. 국감장에 온 기업인의 말을 새겨듣기는커녕 호통이나 치는 의원을 보면 ‘아무런 도움 필요 없으니 아까운 시간을 빼앗지나 마라”는 말이 치밀어 오른다.
신화수취재담당 부국장 hsshin@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