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 "또 없는가" 당당하게 외치자

[데스크라인] "또 없는가" 당당하게 외치자

 ‘유격훈련’. 군인이라면 한 번쯤 거쳐야 하는 과정이지만 악명 높은 훈련 강도에 훈련 전 모두가 겁을 집어먹게 마련이다.

 전라도 화순에는 우리나라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고난도 유격훈련장이 있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만큼 훈련강도는 최상급이다. 그곳에 가려면 완전군장한 채 무등산을 행군으로 넘어야 한다. 여러 날 밤낮으로 계속된 장거리 행군에 군인들은 초주검이 된다. 그러나 도착지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달콤한 휴식이 아닌 인생 최악의 지옥훈련이다. 훈련 도중 죽어나가는 군인이 한 해 걸러 한 명 이상씩 나온다는 근거 없는 흉흉한 소문도 들린다. 부담감 백배다. 작년엔 사망자가 없었으니 올해는 꼭 나올 것이라는 말도 안되는 확률도 마음을 옥죈다.

 고난의 행군을 마치고 들어선 유격훈련장 연병장의 단상 뒤엔 비석도 수십개 서 있다. 섬뜩하다. ‘아, 다들 저렇게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바싹 든 군기에 그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못한다. 수주간의 유격훈련을 마치고 퇴소할 때가 돼서야 비석의 내용이 하나 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또 그 것이 묘비가 아닌 기념비라는 것도 그제서야 깨닫게 된다.

 극한의 훈련을 무사히 마친 수료생들은 그 성취감의 흔적을 비석으로 남겨 놓았다. ‘투혼’ ‘백절불굴’ ‘불꽃처럼 태우리라’ ‘극한 속의 여유’ ‘우리였기에’ ‘초인의 특권’ 등 수료생들의 성취감을 대변하는 글귀가 비석마다 새겨져 있다. 그중 유난히 눈에 띄는 건 까만 비석에 굵직한 흰 글씨로 적힌 ‘또 없는가’다. 문구는 훈련이 끝났으니 이제는 살았구나 식의 ‘안도’의 의미가 아니다. 악명 높다던 훈련의 강도가 고작 이 정도였나, 더 센 훈련은 없느냐는 식의 ‘강한 자신감과 새로운 도전’의 의미를 담았다.

 올 초 우리는 침울한 마음으로 한 해를 맞는다. 미국발 금융위기에 전 세계 소비심리는 꽁꽁 얼어붙었다. 글로벌 기업의 파산과 구조조정 소식이 끊이질 않았다. 100년 만의 위기로까지 설명됐다. 미국에선 리먼브러더스처럼 역사가 백수십년을 훌쩍 넘긴 초대형 금융사가 연이어 나자빠졌다. 세계 자동차 시장을 호령하던 GM, 크라이슬러가 정부에 구원을 요청했다. 독일, 대만, 일본의 반도체 기업들도 파산을 모면하기 위해 체면을 뒤로 한 채 정부에 손을 벌렸다. 세계인의 주목을 받던 소니, 노키아 등도 밑바닥을 기었다.

 그들이 당장의 오늘을 걱정할 때에도 우리나라 기업은 내일을 향해 달렸다. 한 해를 결산하는 현시점 삼성전자는 사상 최대 실적을 목전에 두고 있고, 세계 6위던 현대기아차는 업계 순위를 4위로 끌어올렸다. 또 다른 국내 중견기업과 중소기업들도 다른 나라 기업들이 주춤한 상황에서 생존이 아닌 발전 차원의 실적을 일궈냈다.

 극도의 긴장감을 가지고 시작했던 2009년은 이렇게 저물어간다. 올해의 고된 경험은 담금질한 쇠가 한층 단단해지듯 분명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들 것이다. 자신감을 가져도 좋다. 그래도 긴장의 고삐를 늦출 수는 없다. 세계무역기구(WTO) 협정 위반 논란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부당지원으로 살아남은 해외 경쟁사가 존재하니.

 격동의 한 해를 마무리하는 지금 우리는 건강한 모습으로 살아남아 강자로서의 자격을 갖췄다. 고난을 이겨낸 자여,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당당하게 목청껏 외쳐보자. ‘또 없는가’를.

 최정훈 국제팀장 jhchoi@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