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TV 1위, 메모리 반도체 1위, 디스플레이 1위, 휴대폰 2위. 세계 시장에 자리 잡은 대한민국 IT의 현주소다. 그런데 요즘 ‘세계 정상’이라는 말과 함께 ‘위기’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과거 산업 패권 흐름을 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미국에서 일본으로 간 산업 패권은 한국으로 넘어왔고 중국이 무서운 저력으로 맹추격하면서 턱밑까지 치고 올라왔다.
삼성전자를 위시한 우리 기업이 중저가 제품으로 세계에서 활약하자 일본이 택한 전략은 고가 프리미엄 제품전략이었다. 일본이 프리미엄 전략을 펼칠 때 우리는 중저가 제품으로 세계 시장을 야금야금 먹기 시작해 전세를 뒤집었다. 불특정 다수의 소비자는 값싸고 편리한 제품을 원한다는 평범한 진리가 먹힌 셈이다.
이제 대한민국은 과거 일본이 가던 길을 밟고 있다. 가격 경쟁력을 무기로 추격해 온 중국을 따돌리기 위해 일본과 똑같은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하지만, 과거 우리나라가 일본을 앞지를 때보다 상황이 더 안 좋다. 정부로부터 공장부지와 양질의 생산인력을 지원받아 가격경쟁력을 갖춘 중국 가전업체들은 내수시장 진작 정책인 ‘가전하향’에 힘입어 시장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세계 최대 생산공장이기도 한 중국의 추격은 위협을 넘어 공포 수준에 가깝다. 중국에 1위 자리를 내주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다는 뜻이다.
치킨게임에서 이겨 세계 최정상임을 증명한 반도체·디스플레이 분야도 콧노래만 부르고 있을 때가 아니다. 중국과 대만의 양안 관계가 개선되면 상황은 순식간에 역전될 수 있다. 비록 치킨게임에서 손을 들긴 했지만 대만의 반도체·디스플레이 기술은 수준급이다. 여기에 중국 자금이 결합했을 때의 위력은 상상하기 싫을 정도다.
휴대폰 개념도 바뀌고 있다. 아이폰 열풍은 단지 젊은이들의 호기심 차원이 아니다. 아이폰이 침체한 반도체 수요를 일으켜 경기를 회복시키는 데 일조할 것이라는 말이 이미 현실이 됐다. 세계적인 대기업 CEO들이 관심을 갖고 있고, 유수의 회사들이 아이폰을 대량 구입해 직원들에게 안기는 수준이다. 급변하는 시장 트렌드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아이폰 정도는 자유자재로 쓸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소니는 삼성에 TV시장을 내주고 와신상담했다. 고가 브랜드 전략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느낀 소니는 3D를 다음 타깃으로 삼고 10년 가까이 엄청난 연구개발 투자를 진행하며 권토중래의 마음으로 기다려왔다. 소니는 기나긴 슬럼프를 거치면서도 묵묵히 준비해 온 3D 기술개발 덕분에 작년 말 영화 아바타를 기점으로 폭발적인 관심대상이 된 3D 시장의 도래를 기쁜 마음으로 맞이할 수 있게 됐다.
아이폰 같은 스마트폰이나 3D 붐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다. 제품이나 시장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새로운 개념이다. 세계 정상에 서 있는 대한민국 IT산업에 필요한 것도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미래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비장한 준비가 필요하다. ‘잃어버린 10년’을 경험한 일본 산업사회에서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모두 바꿔라”라고 할 정도로 혁신을 강조하는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을 존경하는 이유다.
주문정 그린데일리 부장 mjjoo@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