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 부품 없이 세트 경쟁력 없다

[데스크라인] 부품 없이 세트 경쟁력 없다

 얼마 전 연 매출 1000억원이 넘는 한 부품업체 사장을 만났다. 오랜 중국 출장에서 돌아온 그의 인사 뒤 첫 마디는 “사업하기가 점점 더 힘들다”는 하소연이었다. 부품업계 종사자들로부터 으레 듣던 얘기라 ‘그러려니’ 했지만, 매출 1000억원을 넘긴 회사 CEO의 이야기라 이날 만큼은 달리 들렸다. 부품업계에서 연 매출 1000억원은 나름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고, 사업을 영위하는 일종의 ‘허들’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내용인 즉, 자기 회사가 생산한 부품의 거의 대부분을 공급받아 쓰는 대기업으로부터 최근 ‘명령 아닌 명령’을 받았다. 앞으로 LCD, LED TV 생산대수를 늘려야 하니 부품 생산량을 현행보다 두 배 정도 늘리라는 것이었다. 언뜻 들어선 ‘많이 사 줄테니, 더 많이 만들어라’는 소리니 좋은 것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그런데 생산량을 늘리려면 1억∼2억원이 아니라, 적어도 20억∼30억원을 투입해 라인을 증설해야 한다. 생산 직원도 더 뽑아야 한다. 그게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다. 양산 뒤 일정 기간은 원가가 높아지면서, 중국산 부품에 가격 경쟁력이 밀릴 것이고 대기업이 ‘계속 사 준다’는 보장도 없는 상황이다.

 그는 2년 전 다른 대기업과의 거래 경험을 지금도 뼈저리게 기억한다. 공급량을 늘려 달라는 대기업의 말만 듣고 은행돈을 빌려 어렵사리 라인을 새로 깔았지만, 낭패를 봤다. 구매를 약속한 대기업이 납품 단가가 비싸다며, 중국 업체로 구매처를 돌려 버렸다. 대기업과의 역학 관계상 몇년 간 구매 지속 조건을 달 수도 없는 입장에서, 그야말로 무방비로 ‘한방 먹은’ 셈이다.

 최근 중국에 머물면서 이 사장은 더 놀랐다. 중국 업체들이 만든 부품의 품질이 놀라울 정도로 좋아진데다, 가격은 여전히 위안화 가치를 감안하더라도 국산 제품보다 30∼40%는 쌌다. 지난달 우리나라가 중국에서 수입한 전자부품은 10억4000만달러 어치다. 1년 전에 비해 무려 28.5%나 늘었다. 대만에서 수입한 6억달러까지 합치면 ‘차이완(차이나+타이완)’으로부터 수입하는 전자부품 규모는 우리나라 전체 전자부품 수입의 45.7%에 이른다. 한국 부품업체로선 중국 부품업체와의 전면전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이 부품업체 사장은 대기업 요청에 불응하기로 했다. 단가 싸움으로 갈 수 밖에 없는 물량 경쟁을 이젠 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라인을 깔 돈으로 새로운 기술을 확보하는 게 장기적으로 더 이득이라는 판단이다.

이젠 세트업체의 시각이 달라져야 한다. 무조건 값싼 부품을 가져와 제품 원가만 낮추면 되던 시절은 갔다. 이제는 좀 더 고기능화하고, 복합화된 부품을 만들어낼 수 있는 업체와 과감히 손잡고, 필요하면 함께 투자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그래야 기존 세트제품을 월등히 뛰어넘는 고부가가치 제품으로 시장에서 승부할 수 있다. 세트 경쟁력의 상당 부분은 부품에서 나온다. 세트산업은 지금처럼 잘 나갈때 일수록, 우리 내부 부품산업 생태계를 풍성하게 만들고, 뛰어난 기술 및 부품 개발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결국 세트산업을 위하는 길이다.

이진호 산전부품팀장 jholee@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