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세에는 영웅이 있다. 적어도 우리는 영웅이 있다고 믿는다. 아주 가끔 진짜 영웅이고, 대부분 환영이나 조작이었지만. 평범한 우리에게 영웅은 로망이다.
근육질 실루엣이 드러나는 스판재질의 유니폼에 우아하게 펼쳐지는 망토의 위엄. 그 위엄은 어린 시절 아마도 집권당 전당대회에서 나눠줬음직한 ‘○○당’ 로고가 선명한 보자기를 목에 두르게 했다. 동네골목에 나지막하게 맞대고 서있는 담벼락에서 뛰어내리기도 했지만, 역시 가장 멋진 포즈는 골목을 내달릴 때 바람에 저항하는 망토의 실루엣이다.
몇 년 전 ‘배트맨 다크나이트’를 보며 깜짝 놀랐다. 아주 오랜만에 잊고 있던 멋진 망토 실루엣을 보았기 때문. 휘날리는 망토의 실루엣, 특히 그 실루엣이 거대할수록 영웅의 힘과 고독도 과장되고, 우리는 과장된 시각적 스펙터클에 매달린다. 하나같이 비루한 삶의 끈을 붙들고 있는 우리는 영웅의 망토를 동경하기 때문이다.
영웅을 발견하고 싶은데, 정말 찾고 싶은데, 없다. 세상에는 영웅보다는 치졸함이 가득하다. 이상하다. 난세라면 영웅이 나와야하는데, 세상이 너무 평화로운가? 민간인 사찰과 블랙리스트가 등장하는 시대가 팍스 코리아나는 아니지 않나?
이 희한한 세상에서 만화는 영웅을 그리워하는 대중들에게 영웅을 보여준다. 그런데 영웅이 영웅스럽지 못하다. 정필원의 ‘패밀리맨’이다. ‘아이언맨’인 토니 스타크나 ‘배트맨’인 브루스 웨인은 백만장자 기업가다. 약간 부족해 보이지만 ‘슈퍼맨’인 클락 조셉 켄트는 신문사 기자고, ‘스파이더맨’인 피터 파커도 대학생이다. 그런데 ‘패밀리맨’은 기러기 아빠에 실업자다.
가족을 위해 지방의 공장에서 일하는 전직구조대원 강호. 공장에 사고가 나고, 무리하게 구조하러 들어갔다가 화상을 입고, 쫓겨난다. 서울로 돌아오지만 차마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세탁소를 하는 친구의 집에 기거한다. 그러던 중 딸을 납치하려는 이들이 등장하고, 이를 막기 위해 누군가가 세탁소에 맡긴 ‘구구맨’ 코스튬을 입고 등장한다. 이후 아들과 딸을 지키기 위해 구구맨이 된다는 이야기다.
우리가 생각하는 멋진 영웅은 아니다. 백만장자도 아니고, 초능력을 갖고 있지도 않다. 게다가 망토의 실루엣이 멋지지도 않다. 하지만 패밀리맨에는 1번 어뢰와 민간인 사찰과 블랙리스트 대신 기러기 아빠와 가족에 대한 사랑이 나온다. 우리가 영웅에게 바라는 스펙터클한 카타르시스인데, 비루한 눈물과 감동을 준다.
하일권, 김진석의 ‘히어로 주식회사’도 영웅에 대한 만화다. 이 만화는 ‘왓치맨’, ‘시빌워’ 처럼 공인이 된 슈퍼 히어로라는 설정에서 출발한다. 특이한 유전자를 지녀 인간 이상의 힘을 발휘하는 슈퍼히어로. 이들이 정상적으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히어로 주식회사’에 입사해야 한다. 그리고 이들은 의뢰를 받아 문제를 해결한다. 히어로 주식회사의 신참 히어로 강영웅은 히어로는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회사에 입사한다. 당연히 갈등이 등장하고, 숨겨진 비밀도 있다.
가족만 지키는 영웅, 돈을 받고 문제를 해결하는 회사에서 정의를 꿈꾸는 영웅. 영웅이 없는 팍스 코리아나, 어쩌면 지금은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 암호 747. 내 가족을 지켜내야 하는 처절한 기러기 아빠의 분투, 정의를 사고파는 세상에 정의를 꿈꾸는 초짜 히어로. 만화와 세상이 자꾸 겹친다.
박인하 만화평론갇청강문화산업대학 만화창작과 교수 enterani@ck.ac.kr
-
권건호 기자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