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 필살기 없는 `세계 4위 PCB`

 13조4000억원. 국내 PCB(Printed Circuit Board) 시장의 지난해 규모다. 올해는 14조가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로봇의 국내 시장 규모가 1조원이고 RFID가 1조원이 채 안 되는 것을 감안하면 작지 않은 규모다.

 약방의 감초처럼 모든 전자기기에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PCB는 아시아가 맹주다. 한국을 비롯해 중국, 일본, 대만 4개 나라가 세계 시장의 79%를 차지한다. 말레이시아 등 다른 아시아 국가까지 합치면 무려 88%나 된다.

 한국은 PCB 시장 점유율 11%로 세계 4위 규모다. 세계 4위지만 웃을 수 있는 처지는 아니다. 소재 국산화와 장비 등 여러 면에서 갈 길이 멀다. 고부가 PCB의 소재 국산화율은 평균 50%가 안 된다. PCB 핵심 장비 중 하나인 CNC드릴머신은 전량 수입한다. 국내외 환경도 녹록지 않다. 다른 제조분야처럼 중국과 일본 사이의 샌드위치 신세다.

 광둥성과 베이징에 대규모 PCB 생산기지를 갖고 있는 중국은 세계 시장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는 대국이다. 양적인 면에서 지난 몇 년간 세계 1위 자리를 굳건히 유지하고 있다.

 중국이 더욱 고삐를 죄고 있다. 환경문제로 신규 설립허가를 안하던 기존 자세를 바꿔 강서성 등에 대규모 신규 공장설립 허가를 내줬다. 새로 짓는 중국의 PCB 공장 규모가 현재의 2~3배는 될 것이라는 후문이다. 중국은 질적인 면에서도 한국을 추월하기 위해 애면글면한다. 소재, 장비 등을 국산화하는 노력과 함께 원가 절감을 위한 자동화에도 힘을 쏟고 있다. 조금 나은 기술력으로 버티는 우리업체에게는 발등의 불이 아닐 수 없다.

 일본의 움직임도 우리를 두렵게 한다. 일본 PCB업체들은 최근 몇 년간 고전을 면치 못했다. 세트업체에 대한 공급 비중이 절대적으로 높은데 도요타, 소니, 파니소닉 같은 자국 세트업체들이 글로벌 금융위기로 흔들렸다.

 일본 기업들은 지난해를 기점으로 전열을 재정비하고 있다. 구조조정이 마무리되면서 일본 PCB업체들은 기존보다 힘이 훨씬 세질 전망이다. 저부가가치 제품은 한국과 중국에 넘기고 부가가치가 높은 제품만으로 승부수를 띄울 태세다.

 최근 한국 파트너 기업 방문차 내한한 일본의 한 PCB업체 임원은 “생산의 대부분을 한국에 넘기고 있다”면서 “대부분의 일본 기업들이 비슷한 처지”라고 설명했다. 가격경쟁력을 버리고 기술력 있는 고부가 제품으로 승부하겠다는 일본은 우리에게 그야말로 설상가상이다.

 지난주 일산 킨텍스에서는 국내 PCB산업의 현주소를 알려주는 국제전시회가 열렸다. 구부러지는 PCB 등 최신 제품들이 선보였다. 그러나 중국과 일본을 따돌릴만한 핵심 제품은 드물었다.

 1963년 단면 제품을 처음 생산하며 PCB 시대를 연 국내 PCB 산업은 이제 50년을 앞두고 있다. 그동안 세계 4위로 성장하며 매출 1조원대 기업도 탄생했지만 여전히 많은 숙제를 안고 있다. 급변하는 글로벌 환경 속에서 국내 PCB 산업이 살아남으려면 역시 우리만의 ‘필살기’를 갖춰야 한다. 때마침 정부가 PCB 산업 발전방안 마련에 착수했다고 한다. 정부가 어떤 ‘필살기’를 내놓을 지 기대된다.

 방은주 경인취재팀장 ejba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