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수사는 만능이 아니다.”
지난달 21일 한국과학창의재단에서 ‘증거의 프리즘, 과학수사’라는 제목으로 개최한 세미나에서는 이 같은 다소 도발적인 질문이 쏟아졌다.
과학수사란 과학적 지식과 과학기기, 시설 등을 최대한 이용해 체계적이고 합리적으로 증거를 처리하며 수사하는 방식을 뜻한다. 화학, 물리학, 생명과학, 의학, 약학, 기계공학, 전자·전기공학, 정보 공학 등 대부분의 과학은 물론이고 사회학, 심리학, 논리학 등 사회과학도 동원한다.
문제는 이 과학수사가 애초의 목적과 전혀 무관한 사회 현상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 전문가들은 과학 수사 미래를 위한 이 같은 문제제기는 “정당하다”고 했다.
◇왓슨은 홈스를 죽였는가…인과관계는 다양하다=이는 과연 ‘A=B’로 단순화될 수 있는지의 물음으로 시작한다.
김준성 명지대학교 철학과 교수는 ‘인과의 다양성’으로 셜록 홈스의 사례를 든다. 셜록 홈스는 절벽 끝에 서서 절벽 아래를 보고 있다. 모라이어티 교수와 왓슨 박사는 절벽 중간에 서 있다. 모라이어티 교수는 홈스를 밀어 떨어뜨리려고 한다. 이런 의도를 아는 왓슨 박사는 홈스를 살리는 가장 높은 가능성은 절벽 바로 밑에 돌출된 큰 바위에 홈스를 먼저 떨어뜨리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만약 자신이 먼저 홈스를 밀지 않으면 모라이어티 교수가 홈스를 밀게 될 것이고 홈스는 땅 끝으로 떨어져 죽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는 홈스를 밀었다.
그러나 홈스는 큰 바위에 부딪힌 후 다시 떨어지면서 몇 번의 충돌 끝에 바닥으로 떨어져 죽었다. 왓슨의 행위는 오히려 홈스를 죽음으로 내몬 것이다. 과학수사가 이 같은 인과관계를 설명할 수 있을까.
◇과학 만능시대 열풍, 냉정하게 돌아봐야=김흥주 원광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교수는 과학수사가 만들어내는 정치적 함의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과학수사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은 ‘과학수사를 다룬 드라마’에서 비롯했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과학 수사 드라마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 네트워크 사회와 결합하며 발생하는 현상에 주목한다.
그는 “과학수사 드라마 소비자는 자기 환상적 쾌락을 실현하기 위해 트위터 등 SNS에 커뮤니티를 만들어 드라마 내용을 분석하고 해석한다”며 “이곳에서 자신의 지위를 만들고 유지하기 위해 다양하고 전문적인 대화적 자원을 획득하려 한다”고 분석했다. 드라마처럼 자신도 보다 냉철해지고 과학적인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노력하며 온라인상에서도 ‘너와 나는 다르다’는 식의 배타적인 사회관계를 형성한다는 뜻이다.
◇과학 드라마는 어떤 이데올로기를 지향하는가=과학수사드라마가 우리 사회에 불필요한 믿음을 유포한다는 지적도 있다.
김흥주 교수는 미국 인기 드라마 CSI 사례로 이를 날카롭게 지적한다. CSI는 두뇌와 과학지식을 무기로 범죄와 맞서는 드라마다. 그는 “드라마는 세상이 미친 것이 아니라 미친 소수의 개인이 문제라는 믿음을 유포한다. 그들만 제거하거나 막아내면 세상이 안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범죄는 개인 문제이기보다는 사회적 구성물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누명을 쓰는 일이 없다’는 환상도 유포한다. 티끌 하나에서도 증거를 발견함으로써 과학은 전지전능한 심판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이념은 과학 만능주의로 이어진다. 멀게는 황우석 사태부터 전 국가적인 논란을 낳았던 천안함 사건, 광우병 파동 등도 같은 맥락이라는 뜻이다. 강력한 공권력을 정당화하기도 한다. 그는 “드라마 속에서 수사대는 사진 한 장으로 전국 전과자 데이터베이스에서 용의자를 찾아내고 자동차 유리 파편 하나만으로도 순식간에 차량 소유자를 찾아낸다. 국가 기관의 컴퓨터에 시민의 정보가 통째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됐다면 그곳이야말로 위험사회”라고 했다.
◇과학수사의 미래는=과학수사 발전에 ‘브레이크’는 없다.
한면수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유전자감식센터장은 “유전자 분석 시간도 더욱 빨라지고 한꺼번에 더 많은 실험을 할 수 있어 과학수사에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라며 “사건 현장에서도 간편하게 여러 가지 분석을 할 수도 있고, 분석된 자료는 바로 중앙에 있는 범죄자 데이터베이스와 비교해 한층 더 신속하게 범인을 검거할 수 있다”고 말했다. 동위원소 분석기술 등을 이용해 토양·페인트·담배 필터·모발 등 미세증거를 분석하고, 이를 데이터베이스화해 증거가 어디서 발생해 어디로 옮겨졌는지를 추적하고 일치성도 확인할 수 있다.
이 때문에 과학수사가 보다 발전하기 위해서는 과학도들도 이런 폐해를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한 센터장은 “범죄 사건은 사회 안전망을 통해 사전에 철저히 예방하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이라며 “과학자가 직접 범죄자를 잡아내는 것은 아니지만, 범죄를 사전 예방하는 효과를 얻어내고 그만큼 우리사회를 보다 안전하게 지켜내는 데 보탬이 될 수 있게 하는 게 기본적 목적”이라고 말했다.
김흥주 교수는 “과학기술사회는 위험은 통제될 수 있으며 미래는 예측할 수 있고, 과학적 산물은 누구에게나 혜택을 부여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러한 과학의 신화화를 냉정하게 돌아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진욱기자 coolj@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