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쪼매난 것(트랜지스터)이 한 개 20∼30달러나 하고, 손가방 하나면 몇 만달러가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도 면직물밖에 수출하지 못하니…. 차로 한 곳간을 채워도 손가방 하나만큼도 못하니…. 내 이래서 김 박사를 보자고 한 겁니다. 김 박사. 우리나라도 전자공업을 육성하고 싶은데 도와주시오.”(조갑제의 ‘내무덤에 침을 뱉어라’ 중에서)
대한민국 전자산업 기초를 다지고 IT 대표 일간지 ‘전자신문(당시 전자시보)’을 창간한 김완희 박사가 지난 24일(현지시각) 미국에서 별세했다.
1926년 경기도 오산에서 태어난 김 박사는 경기중학을 졸업하고 서울 공대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했다. 이어 1953년부터 1955년까지 미국 유타대학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밟았는데 이때 그는 전자공학계의 ‘피타고라스의 정리’라 할 정도로 유명한 ‘브루니 정리’의 예외를 발견, 이를 박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했다. 김완희 박사의 이론은 이후 전자회로 설계 표준으로 자리잡았다. 그는 이 이론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어 1958년부터 명문 컬럼비아대학 교수로 재직했다.
1967년 8월 근대화의 물꼬를 전자산업에서 찾고 있던 박정희 대통령은 당시 창설 중인 KIST 최형섭 박사 추천으로 김완희 박사를 찾았다.
박 대통령의 부탁을 받은 김완희 박사는 ‘전자공업센터 설립 계획안-국가의 기초산업과 수출산업으로서의 전자공업 중점 육성책의 근거’란 보고서를 만들어 대통령께 보고한다. 이 보고서가 오늘날 ‘IT코리아’ 시금석이 됐다.
전자산업이란 용어도 김완희 박사 작품이다. 당시 전기기계공업이라는 일본식 용어를 김 박사가 전자(Electronic)와 산업(Industry)을 조합해 전자산업 혹은 전자공업이라 쓰기 시작했고 뒤따라 일본에서도 이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한국 생활을 접고 미국으로 돌아가서도 그는 우리나라 전자산업에 대한 애정을 놓지 않았다. 지난 2009년 국가기록원에 박 대통령과 나눈 103점의 서신을 기증하기 위해 방한했던 김완희 박사는 당시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지금은 새로운 정책을 발굴하기보다는 응용력을 높여야 한다”며 “정책 입안자가 IT 가치와 흐름을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노 과학자가 요즘 말하는 컨버전스나 융합의 중요성를 강조했던 것이다.
김완희 박사 서거에 대해 이명박 대통령도 조전을 통해 ‘대한민국 과학기술 발전과 전자산업의 기초를 다지고 산업계 최초의 일간지 전자신문을 창간하신 박사님의 열정과 업적들은 국민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며 애도의 뜻을 표했다.
그는 컬럼비아대학 교수라는 명예도 마다하고 정부 공식 직제도 받지 않고 오직 우리나라 전자산업이 세계 시장에 우뚝 서는 것을 필생의 업으로 살아온 선각자이자 애국자였다.
지금 우리는 치열한 글로벌 IT경쟁에서 또 한번의 도약을 꿈꾸고 있다. 생산현장이나 연구소, 글로벌 비즈니스 현장에서 뛰는 모든 IT인들 가슴 속에 김완희 박사의 열정이 녹아 있길 바란다.
김완희. 그는 대한민국 전자산업의 출발점이었고 오늘의 IT코리아를 키운 스승이었다.
홍승모기자 smho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