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치를 보다’는 사전적으로 남의 마음과 태도를 살핀다는 뜻이다. 같은 뜻을 가진 표현으로 ‘눈치를 살피다’도 자주 사용된다. 대체로 ‘갑’과 ‘을’ 관계에서 을이 주로 취하는 행동이다. 상대방 심기를 건드리지 않겠다는 의중이 포함된 것으로 서로의 관계를 잘 드러내는 용어다.
얼마 전 정부 관계자와 반도체 장비 업계가 모여 국내 반도체 장비 업계를 활성화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는 자리가 열렸다. 이 자리에 모인 장비 업계 관계자들은 한결같이 “그 분들이 안 계셔서 말하기 편하다”며 말문을 열었다. ‘그 분들’이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았으나 그 자리에 앉아있던 모든 사람들은 암묵적으로 이미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 분들’은 ‘갑’인 반도체 제조업체들이고 장비 업계인 본인들은 ‘을’이다.
‘그 분들’이 안 계시니 편하게 속내를 내비쳤다. “장비를 국산화해도 구매를 안 해주니 무용지물이다”는 하소연이 나왔다.
“그 분들이 신기술 개발 정보를 알려주지 않아 개발에 어려움이 많다”거나 “사용하던 장비가 고장이 나도 정확한 과정을 안 알려줘 원인을 찾는데 애를 먹는데 외국 업체는 모든 과정을 소상히 가르쳐 주더라”며 섭섭한 감정도 보였다.
정부 관계자에게 업계를 활성화하려면 ‘그 분’들도 함께 자리를 해서 토론을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불만도 토로했다. 오랜만에 할 얘기를 했다는 말과 함께 ‘그 분들’에게는 이번 토론이 내용이 알려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뜻도 건냈다. 이날 ‘그 분’들이 같은 자리에 있었다면 토론 내용은 판이하게 달랐을 것이라며 한 장비업체 사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수출 비중 1위 품목인 반도체 후방을 지키고 있는 장비 업계 현실이다. 국내 반도체 장비 시장은 세계 시장의 20%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막대하다. 반면에 국산화 비율은 21%에 그치면서 최근 몇 년간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눈치만 살펴야하는 ‘갑’과 ‘을’의 관계로는 더 이상 진전된 미래를 보장할 수 없다. 수년째 ‘상생’을 입으로 외치고 있는 반도체 ‘갑’들도 이제는 ‘을’들의 눈치를 살펴야 한다.
서동규기자 dkseo@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