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템을 개선한다고 해서 결재했을 뿐입니다. 그게 스캘퍼(초단타매매자)에게만 불공정하게 시스템을 제공한 것인지는 몰랐습니다.”
얼마전 주식워런트증권(ELW) 사태로 법정 구속 위기에 처한 증권사 사장이 항변조로 한 말이다. 증권사 IT시스템에 대해 깊게 알지 못해 그냥 결재만 했다는 게 변명의 요지다.
대형 증권사 대표가 경영 전반에 대해 인지하기도 어려운데 전산까지 책임져야 하느냐는 게 당연한 항변일 수 있다. 증권사 CEO 대부분이 학창시절 경영이나 경제, 무역, 법학 등 인문·상경계열 지식을 배우고 이후에도 주식거래와 고객관리 등 경력에만 치중해 온 게 보통이다. 실제 IT는 전산담당자나 최고정보기술책임자(CIO) 몫이라는 게 금융업계의 전반적인 통념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러한 IT에 대한 무지가 최고경영자가 법을 어기고 고객을 불신하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는 점이다. 올 초 현대캐피탈과 농협에 이어 거래소, 농협 계열 NH투자증권, 현대증권이 잇따라 전산사고를 냈다. 지난 25일에는 우리은행 전산시스템이 마비됐다.
금융권이 경쟁적으로 고객을 유인하기 위해 IT시스템을 개선하고 돈을 투자했지만, 오히려 사고가 늘어난 것이다. 실제 증권사 전산장애 민원은 작년 상반기 105건, 하반기 289건, 올해 상반기 297건으로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다. 최근에는 스마트폰·스마트패드 등 모바일 거래까지 큰 폭 늘고 있어 관련 사고 발생도 증가할 소지가 크다.
그럼에도 금융권 최고경영진의 IT에 대한 관심은 아직 제자리다.
한 증권사 CIO는 “경영회의에 참석해도 경영진들 대부분이 IT에 대해 아는 게 없을 뿐더러 관심도 없어, 얘기 자체를 안하는 게 일반적이다”며 금융권 분위기를 전했다. 금융권에서 CIO는 아예 경영회의에 참석하지 않거나 하드웨어를 관리하는 외곽부서 정도로 인식되는 게 여전한 현실이다.
이런 분위기속에 전산사고로 인해 고객의 신뢰를 잃을 가능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또 어떤 금융권 대표가 전산문제로 멋모르고(?) 결재를 하다 법정에 불려갈지 모를 일이다. CEO가 IT를 모른다고? 그럼 이제 IT를 아는 CEO나 전문가를 찾아서 지혜를 빌려보자.
이경민기자 kmlee@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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