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문정의 그린로드]정전, 올 겨울과 앞으로 4년이 더 걱정이다

 대낮에 서울 도심 한 복판에서 정전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믿을 수 없었다. 전력 공급이 불안한 다른 나라 이야기라 생각하고 흘려보냈다. 서울 뿐 아니라 전국 곳곳에서 발생한 일이란다. 귀를 의심했지만 실제 상황이었다. 한 여름이나 한 겨울, 불가항력에 의한 일이 아니었다는 점, 평소 같았으면 아무런 문제없는 전력수요였다는 점이 허탈하게 했다. 지금은 정상으로 돌아왔지만 후유증이 만만치 않다.

 사상 초유의 전국 정전사태가 일어난 지 한 달이 돼 간다. 지식경제부가 지난주에 접수한 9.15 정전사태 피해 규모는 총 8962건(피해건수), 610억원(피해액)으로 집계됐다. 10조원 규모의 피해를 낸 과거 미국 뉴욕 대정전 등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전력 서비스 선진국이라 자처해 온 대한민국은 확실히 체면을 구겼다. 주무부처 장관과 산하기관 기관장이 사태의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정부 차원 합동점검반을 꾸려 운영에 들어갔고 지난달 26일엔 재발방지대책도 내놨다. 실무기관인 전력거래소도 대책반을 확대 개편하고 세부 액션플랜 마련에 들어갔다.

 9.15 정전사태는 어느 정도 예고된 일이다. 지난 10년 동안 최대 전력수요를 경신을 거른 해가 없었고 2009년에는 겨울철에 최대 전력수요를 갈아치웠다. 예비전력이 10% 이하로 떨어진지도 오래다.

 일단 급한 불은 껐지만 당장 올 겨울과 신규 대형 원전을 완공하는 2015년까지 앞으로 4년이 고비다. 최근 들어 겨울철에 최대 전력수요를 경신하는 이상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지난 겨울에는 두 차례에 걸쳐 최대 전력수요를 갈아치웠다. 난방시스템이 가스나 기름에서 전기로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여름철은 그나마 관리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있다지만 겨울철엔 속수무책이다. 전기 사용자들의 절약만 바랄 뿐이다. 사실 9.15 정전사태 다음날인 16일 오후에도 전력 예비율은 초비상 상태까지 갔다. 전날 과도한 전력사용으로 정전이라는 초유의 경험을 했음에도 전력 사용이 줄어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 부족 국가라고 외치지만 물을 ‘물 쓰듯’ 하는 것처럼 전기도 아낌없이 쓰고 있다.

 대한민국은 전력 부족 불감증에 걸린 듯하다. 전력공급을 위한 설비는 모자라지만 가격은 싸고 수요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다. 공급은 부족하지만 가격은 저렴한 ‘전기요금의 역설’이다.

 한전에서 시작된 전기요금 인상 주장이 정전 사태를 계기로 확산하고 있다. 전기요금을 인상해서 수요를 줄여야 한다는 대전제는 맞겠지만 제조업 수출로 먹고 사는 우리나라로서는 쉬운 결정이 아니다. 전기요금을 올리더라도 일괄 적용을 하기보다는 필요해서 쓰면 조금 비싸게 공급하고 수요가 없을 땐 저렴하게 하는 공급제도가 필요하다. 스마트그리드를 조기에 구현해야 한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다.

 비상용 자가발전기만 해도 그렇다. 전문가들은 일정 규모 이상의 건물에 설치된 비상용 자가발전기 60% 이상은 지금도 제대로 가동하지 못할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운영규정이 따로 없어 몇 년간 방치돼 먼지만 쌓여 있다는 주장이다. 한 전문가는 전국에 설치된 비상용 자가발전기만 제대로 가동해도 300~400만㎾는 대체할 수 있을 것이라며 관련 운영규정과 계통 연계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과거 우리 정부는 전력 수요를 공급으로 덮는 정책을 써왔고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다. 그러나 올 겨울에도 한 자릿수 전력 예비율이라는 외줄타기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상황은 신규 대형 발전설비가 완성되는 2015년까지는 마찬가지다.

 9.15 정전사태는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사고지만 우리나라 전력공급 위기를 드러냈다는 점에선 큰 의미를 가진다. 9.15 정전사태가 치명적인 인플루엔자를 이겨내기 위해 미리 맞은 예방주사였길 바랄 뿐이다.

 주문정 그린데일리 부국장 mjjoo@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