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 연구원들의 `9 to 5`

[데스크라인] 연구원들의 `9 to 5`

 정부출연연구기관 연구원들이 달라졌다. 변심했다.

 연구원 심경변화는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상징, 대덕연구단지 네거리 출퇴근 풍경을 들여다보면 바로 읽힌다. 몇 년 새 출퇴근 시간대 편도 4차선에 몰리는 연구원 차량이 부쩍 늘었다.

 공무원처럼 오전 9시 출근해 오후 5시 퇴근하는 ‘9 투(to) 5’ 때문이다. 연구원들에게 ‘9 투 5’는 사보타지나 마찬가지다.

 연구는 주로 밤에 한다. 낮 시간대엔 집중하기가 쉽지 않다. 랩실 문에 집중근무시간 표지를 걸어도 소용없다. 오전 9시 출근해 보고서 쓰고 전화 상의하고, 메일함 정리하고, 회의하고 잡무처리하고 나면 오전이 다 간다. 점심 이후엔 방문객이 줄서 있다.

 공무원 만나야 하는 서울 출장도 빈번하다. 돈줄을 쥐고 있는 공무원에게 “바쁜데 다음에 봅시다”라고 했다간 과제 날아가기 십상이다. 연구원에게는 한 과제가 유일한 밥줄이지만, 공무원에게는 수백 개 중 하나일 뿐이다.

 ‘R&D’ 속성은 공무원 서류작성과는 엄연히 다르다. 생명을 다루는 의사만큼이나 몰입도가 중요하다. 그런데 ‘밤’을 포기하는 연구원이 최근 늘었다.

 감사원 감사도 크게 한몫 했다. 일부 기관은 감사원이 요구한 대외활동 자료 챙기느라 연구원이 내부 통신망에 한꺼번에 몰려 다운되는 사태도 겪었다.

 “달라니 다 줬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연구원이 밤새워 일하는 건 기대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1100명 연구원이 자료 주면서 모두 이런 생각 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이제부터는 정시 출퇴근할 것입니다. 서로 믿지 못하는 세상이 된거죠.”

 20년간 ETRI서 일했다는 K부장 항변이다. “2000년 이전만 해도 연구원 자긍심이 대단했어요. 스스로 IT분야 최고라고 생각하며, 국가를 위해 헌신한다는 보람과 긍지가 있었습니다. 당시엔 ‘연구에 미쳤다’는 소리까지 들어가며 날을 샜지요.”

 연구원들이 일에 미쳐야 세상을 ‘미치게’ 하는 결과물이 나오는데 요즘 세태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사실 10년 전만해도 출연연이 몰려있는 대덕은 새벽까지 불 꺼지지 않는 연구실로 유명했다. 새벽 5시 30분에 퇴근하는 연구원도 허다했다.

 정부도 할 말은 있다. 지난해 R&D 투자 15조원. 이 가운데 4조원이 정부출연연구기관으로 들어갔다. 4년간 16조 가량을 투입했지만 이렇다 할 결과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5일에도 동료 연구원 한명이 세상을 떴습니다. 이제는 연구원의 열정도 애정도 싸늘하게 식고 있다는 걸 정부는 알아야 합니다. 정부가 시스템으로 압박하면 할수록 창의는 죽어갈 것입니다.”

 젊은 연구원 목소리다. R&D를 강제하는 한 대한민국을 바꿀 연구 성과물은 더 이상 없다. 그저 실패하지 않은 연구결과만 있을 뿐이다.

 박희범 전국취재팀 부장 hkpark@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