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의사결정의 역설

요즘 젊은이들은 PC통신 `천리안`을 모른다. 위성통신 이름 아니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40대 이상 중·장년층은 다를 것이다. 파란 바탕에 깜빡이는 하얀 글자로 뉴스를 검색하던 기억을 떠올리는 이가 많다. 1990년대 후반 `천리안`의 기업 가치는 지금의 `네이버`를 능가했다. 당시 연매출이 4000억원에 달했다. 지금 물가로 환산하면 1조원이 넘는 규모였다. 하루 두세 시간만 이용해도 월 30만원에 이르는 요금폭탄이 터졌다. 그래도 젊은이들은 열광했다.

그런데 천리안의 추락은 한순간이었다. 인터넷이라는 격랑에 휩쓸렸다. `천리안`의 명성을 `네이버`와 `다음`이라는 신흥 강자가 가져갔다. 시장 패러다임 변화에 둔감했던 기업의 최후였다. 지금 통신업계엔 천리안 출신 임원이 많다. 그들은 타임머신을 탄 느낌이라고 한다. 요즘이 시간을 거슬러 천리안이 침몰하던 때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보이스톡` 등장이 막연한 우려를 현실화했다고 강조한다. 문제는 실패 시나리오를 그대로 닮아간다는 것이다. 천리안 출신 통신사 한 임원은 증언한다. “당시 천리안 직원들도 하나같이 인터넷 혁명에 적응하지 못하면 망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장 돈이 되는 PC통신에 집중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통신 대기업이 벤처 `카카오`를 못 이기는 것은 납득이 잘 안 된다. 똑똑한 엘리트 직원 수나 자본력에서 압도하기 때문이다. 마음만 먹으면 `카카오톡` 같은 서비스는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안 된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으뜸은 모순된 의사결정 구조다. 통신 대기업의 경영을 주도하는 주류 세력은 여전히 음성 통신 담당 임원들이다. 매출의 70∼80%가 아직 여기서 나오기 때문에 이들의 `입김`은 절대적이다. `보이스톡` 논란 이후 음성 매출 감소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대응이 나온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스마트 혁명으로 통신사 사업 모델도 기로에 섰다. 그간 네트워크를 연결해주기만 하면 돈을 벌던 `커넥티비티(connectivity) 비즈니스`는 PC통신처럼 종말이 임박했다. 통신사 경영진도 이 사실을 안다. 하지만 정작 의사결정은 커넥티비티 비즈니스 중심으로 이뤄진다. 콘텐츠나 플랫폼 사업 임원들은 여전히 의사결정 과정에서 `을`이다. 의사결정 메커니즘의 아이러니다.

일본 석학 다키타니 게이치로는 저서 `기업을 변혁시키는 충돌의 의사결정`에서 “과거 생각의 연장선 위에 있는 해결 방법은 개선과 개량에 그친다”고 강조했다. 시장 파괴자가 살아남는 스마트 혁명 시대다. 기득권에 연연하는 의사결정 시스템이 파괴되지 않으면 `제2의 천리안`이 나오는 것도 시간문제다.

장지영 통신방송산업부장 jyajang@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