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우리나라 소재부품 산업은 대변혁을 주도할 전망이다. 오랜 기간 고착됐던 산업의 판이 우리나라를 중심으로 크게 요동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미국·일본 등 선진국에 의존했던 우리 소재부품산업은 뛰어난 품질과 안정된 공급망을 구축하면서 빠르게 시장 주도권을 확보하고 있다. 급성장세인 스마트폰 부품 시장은 세계 1위 자리를 차지한 삼성전자를 중심으로 부품 공급망관리(SCM) 체계가 재편되기 시작했다. 시장 헤게모니의 이동에 따라 외국계 소재 업체들은 잇따라 한국 시장 진출을 모색하고 있다. 급격한 시장 변화에 맞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요구되는 때다. 새해 우리 소재부품산업이 직면한 과제와 새로운 도전을 키워드별로 점검한다.
◇쏠림현상 심화=올해 소재부품 산업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가 `쏠림 현상`이다. 극단적인 쏠림 현상으로 인해 새로운 거래 질서가 정립되고 있다. 반도체 시장이 단적인 예다.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은 최근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도시바, 마이크론 등 4강 구도로 재편됐다. 특히 미세 공정 기술을 선점하며 대량 양산체제를 구축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시장의 50%가량을 점유하고 있다. 반도체 산업의 특성상 미세 공정 기술 확보가 곧 가격 경쟁력으로 이어진다. 신공정 개발에 투자할 수 있는 자금력과 기술을 보유한 국내 기업들이 시장을 주도하는 이유다.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국내 업체의 시장 점유율 비중은 올해도 계속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은 20나노 공정기술을 확보한 반면 해외 경쟁사들은 아직 미세 공정 기술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특히 20나노 공정이 본격 적용될 것으로 보이는 프리미엄급 스마트폰용 메모리 시장에서는 국내 업체의 독주가 지속될 전망이다. 삼성전자는 최근 14나노 공정 기술 확보에도 나섰다. 해외 업체들은 자동차, 의료기기 시장에서 신사업을 모색하고 있지만 여의치 않은 상황이다.
시스템 반도체 시장에서는 최대 수요처인 스마트폰 시장에서 삼성전자와 퀄컴이 양강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최근 삼성전자와 애플이 스마트폰 시장을 양분하면서 공급처도 단순화됐다. 그동안 PC용 중앙제어장치(CPU)로 비메모리 시장에서 맹위를 떨치던 인텔은 PC시장의 불황과 함께 주춤한 모양새다.
이 같은 쏠림 현상은 장비, 소재 등 후방 산업의 재편으로 이어지고 있다. 고객사군이 시장 지배적 기업 위주로 고착화하면서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고, 가격 인하 압박에 시달리게 될 가능성도 크다. 후방 산업의 재편은 곧 완제품 시장의 공급망 불안으로 이어진다. 세계 후방 산업이 어떻게 변화할지 업계의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투자 위축=지난해 국내 제조업계의 투자 위축에 가장 큰 영향을 끼진 요인은 대내외적 불안정성이다. 유럽발 경기 침체가 지속되고 있고, 신정부가 펼칠 정책도 뚜렷하지 않다.
정책금융공사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제조업의 신제품 생산을 위한 설비투자 규모는 약 14조원으로 2011년 대비 5.5% 하락했다. 설비확장과 유지 보수 투자는 각각 1%와 0.9% 성장에 그쳤다.
통상 제조업은 경기가 침체되면 설비 투자를 우선 줄인다. 삼성디스플레이는 당초 지난해 연말까지 플렉시블 디스플레이를 양산할 5.5세대 신공장(A3)을 가동할 계획이었지만, 개발 성과가 부진한 탓에 올해 이후로 미뤘다. LG디스플레이도 생산 라인이나 신기술 개발에 대한 투자를 보류했다. 반도체 시장을 주도하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마찬가지다. 이미 시장 수요를 충족시킬 생산 능력을 확보했다. 해외 경쟁사와 기술 격차도 크다. 굳이 대규모 투자를 진행할 이유가 없다.
시장 주도권을 유지하고 후발 주자의 맹추격을 따돌리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투자로 생산 능력과 신기술을 확보해야 한다. 중국은 정부 차원에서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산업을 육성, 무서운 기세로 우리나라를 추격 중이다.
◇공급망 재편=삼성전자와 애플발 SCM 재편은 새해 더 뚜렷해질 전망이다. 특히 스마트폰 시장 세계 1위 자리에 오른 삼성전자는 지난해 공용 부품이 아닌 차별화된 핵심 부품을 중심으로 경쟁사의 협력사를 빨아들였다. 급성장세인 스마트폰 시장에서 충분한 부품 물량을 확보, 위상을 확고히 하겠다는 포석이다.
삼성전자는 지금까지 기존 협력사들을 중심으로 설비 투자를 유도하며 생산 능력을 확대했다. 그러나 삼성전자의 올해 스마트폰 판매 목표는 3억5000만대다. 지난해 목표였던 1억5000만대보다 무려 75%나 늘어난 수치다. 기존 협력사들의 설비 투자 증설에는 한계가 있다. 삼성이 핵심 부품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SCM 전략에 나선 이유다.
삼성전자에 스마트폰 부품 업체들이 급격히 쏠리면서 산업 구도에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다. 삼성에 부품 공급이 몰릴수록 경쟁사들의 SCM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삼성과 신규 거래하는 협력사들은 모토로라·LG전자·RIM 등에 부품을 공급하던 업체다. 더 많은 부품을 구매해야 하는 삼성과 대형 수요처를 발굴해야 하는 부품 업체의 이해관계가 자연스럽게 맞아떨어진 결과다. 그러나 한 쪽으로 부품 업체들이 쏠리면 경쟁사들은 가격 절감과 신기술 개발이 더욱 늦어질 수밖에 없다. 핵심 기술 정보가 유출될 가능성도 있다. 경쟁사의 더딘 신제품 개발 속도는 결국 소비자의 선택권이 좁아지는 결과로도 나타난다.
◇신성장동력=올해는 우리 소재부품산업이 이미 포화 상태인 기존 시장에서 탈피해야 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시스템 반도체, 대면적 능동형(AM)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등 신성장동력 발굴과 신시장 개척에 나서는 중요한 한 해다.
우리나라는 메모리 반도체 강국이다. 그러나 세계 반도체 시장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것은 고부가가치 제품인 시스템 반도체다. 한국의 시스템 반도체 시장 점유율은 고작 4%에 불과하다. 시스템 반도체 산업을 집중 육성해야 하는 이유다.
지난해 지식경제부는 시스템반도체(SoC)와 관련 장비 및 재료 산업을 집중 육성하는 내용의 `반도체 산업 육성 정책 방향`을 발표했다. 메모리 반도체에 비해 경쟁력이 약한 국내 시스템반도체와 장비 산업을 육성하고, 대기업의 독점이 심화되는 시장에서 국내 업체들을 지원하는 것이 골자다. 올해부터 오는 2020년까지 총 3230억원을 투입할 계획이다.
국내 대기업도 팔을 걷었다.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등 급성장하고 있는 시스템 반도체 시장에 대응하기 위해서다. 삼성전자는 지난 2010년 경기도 기흥단지를 시스템 반도체 생산기지로 전환하고 미국 오스틴 시스템 반도체 생산라인 설비를 확충하는 등 발 빠른 전환에 나섰다. 지난해 삼성전자의 시스템 반도체 투자규모는 약 7조3000억원으로 사상 처음 메모리 반도체(6조8000억원)를 추월했다.
디스플레이 업계는 대면적 AM OLED TV용 패널 개발에 총력을 기울일 것으로 보인다. 당초 삼성디스플레이와 LG디스플레이는 55인치 크기의 AM OLED 패널을 지난해 연말까지 양산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증착·봉지 등 핵심 공정에서 기술적인 한계에 부딪쳐 생산 기술을 원점에서 재검토하기로 했다.
대면적 AM OLED 시장은 후발 주자들의 도전이 거세다. 대만 AUO는 지난해 일본 소니와 협력해 AM OLED 기술 개발에 착수했다. 싱가포르 4.5세대 라인에 6세대용 파일럿 장비를 들여놓고 AM OLED TV용 패널 개발을 시작했다. AUO는 향후 2~3년 내에 대형 AM OLED 패널 생산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한다. 비저녹스를 비롯한 중국 5개 업체도 AM OLED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비저녹스는 5년 내 30인치 이상 AM OLED TV 패널 생산 계획을 세웠다.
◇한국을 잡아라=외국계 소재 기업의 한국행 러시는 한층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이 디스플레이, 반도체, 스마트폰 등 거대 시장에서 우위를 점하면서 세계 최대 소재 수요처로 급부상했기 때문이다. 특히 연구개발(R&D) 거점 확보가 외국계 업체들의 필수적인 현지화 전략으로 굳어지면서 기존 R&D센터를 확충하거나 신축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일본 야노경제연구소, 가트너 등 글로벌 시장조사 업체들도 국내 소재 시장에 대한 조사 자료를 늘리는 추세다.
소재 산업은 완제품 산업의 시장 경쟁력을 좌우한다. 핵심 소재가 완제품의 품질과 기능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외국계 기업들의 국내 시장 진출은 신성장동력 확보 외에도 세계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한국 기업을 고객사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다.
그러나 외국계 소재 업체의 급격한 시장 유입은 국내 기업에 큰 위협 요인이다. 자금난에 시달리고 있는 국내 기업이 외국계 기업의 막대한 자금력에 무방비로 노출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본 호도가야화학공업은 지난 2010년 국내 OLED 소재 업체인 SFC의 지분을 약 30%를 인수하고, 이후 64%까지 지분을 늘려 자회사로 편입했다. 또 지난 2008년에는 글로벌 전자재료 업체인 롬앤하스가 국내 OLED 소재 업체인 그라쎌디스플레이를 인수한 뒤 지난 2009년 다우케미칼에 지분을 넘겼다. 그라쎌은 현재 다우케미칼의 자회사다.
◇2013년 소재부품산업 키워드
윤희석기자 pioneer@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