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화통이 터졌다. 벌써 몇 번째인가. 그래도 꾹 참고 억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우리 회사 개발역량이 빠듯합니다. 조금 여유가 생기면 다음에 꼭 하겠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해를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뚱 했다. 돌아서면서 들으라는 듯 한마디 했다. “우리 차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얼마나 영광인데….”
가슴이 쿵쾅거렸다. 불덩이 같은 것이 올라왔다. 하지만 애써 못 들은 척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잘 나간다는 자동차 회사에서 연락을 받고 얼마나 좋아했던가. 그런데 여기도 허탕이다. 앱을 공짜로 개발해달란다.
애시당초 기대하지 말았어야 했다. 글로벌 휴대폰 기업 두 군데서 똑같이 당하지 않았던가.
한달 전 A전자 관계자의 당당한 표정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마치 트라우마 같다. 그는 첫 만남에서 대뜸 자신들의 `앱 장터`에 우리 앱을 올려달라고 했다. 세계 1위 스마트폰 기업의 제안이라 솔깃했다.
그런데 새로운 플랫폼에 맞춰 앱을 개발하려면 상당한 개발비가 필요했다. 지금 구글과 애플 앱스토어에서 서비스 중인 앱은 아직 큰 돈을 못 번다. 수익모델을 만들기 전까지 시스템 통합(SI) 외주 사업과 같은 아르바이트를 한다. 하루 하루 근근이 버티는 형편이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우리에게 어떤 메리트를 주실 건가요?”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우리가 홍보해주겠습니다. 우리 장터가 나중에 잘 되면 대표 앱 가운데 하나로….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좀 더 직설적으로 말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가장 좋은 협력모델은 대기업의 자본과 중기의 기술이 만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는 “좀 알아보겠다”고 했다. 며칠 후 그는 “금전적 지원은 없다”고 못박았다. 결국 공짜로 앱을 개발해달라는 이야기였다.
엊그제 B전자 관계자도 찾아왔다. 그는 새로 개발 중인 차세대 스마트폰에 우리 앱을 선탑재하겠다고 했다. 그의 첫마디도 “홍보해주겠다”였다. 미팅을 빨리 끝내고 싶었다. “우리 역량이 아직 모자랍니다. 다음에 꼭 기회를 주십시오.”
우리나라 대기업들과의 만남은 이렇게 허망했다. 미팅 전날 비행기를 탄 듯 부풀었던 가슴은 마치 자이로스코프를 탄 듯 곤두박질 쳤다. 유망 개발사에 다양한 펀드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구글·애플과는 마인드가 달라도 한참 달랐다.
오늘 아침 신문에 어떤 통신사에서 1000억원대 중소기업 상생펀드를 만든다는 기사가 큼지막하게 실렸다. 다른 통신사도 지난 주 비슷한 상생 프로그램을 발표했다. 다음주엔 C통신사 관계자가 보자고 했다. 이번엔 어떻게 예의를 갖추고 거절해야 할까.
“기자님, 우리 대기업들이 진짜 벤처와 상생할 마음이 있을까요?” K사장은 쓴 소주 두 잔을 연거푸 들이켰다.
장지영 통신방송산업부장 jyajang@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