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주간 본지 기획으로 나간 `문화융성, 콘텐츠가 만든다` 시리즈에 대한 반응이 뜨겁다. 우리 콘텐츠산업이 처해 있는 현실을 제대로 짚고, 이를 넘어설 수 있는 대안을 제시했다는 얘기를 듣곤 한다.
사실 우리나라 문화·콘텐츠가 요즘처럼 세계인을 매료시킨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드라마 `대장금`이 지구상 가장 엄격한 원리주의가 지배하는 이란 무슬림 사회를 사로잡았고, 인기 걸그룹의 율동 하나는 베트남, 태국 청소년들이 베낀 듯 따라한다. 각국 세종학당은 한국말을 배우려는 이들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싸이는 우리 노래가 빌보드에 오르내리는 것을 자연스럽게 만들었고, 세계적 감독 봉준호의 신작 `설국열차`는 개봉하기도 전에 160여개국에 선수출돼 2000만달러 이상을 벌어들였다.
선진국은 달리 선진국이 아니다. 가만히 앉아서도 세계인이 그 문화에 반해 찾아오고, 우리가 만든 창작품에 금전적 가치와는 별개로 열광하고 따라하려는 수준이 됐을 때 비로소 `잘사는 나라`라고 내세울 수 있다.
인류 역사상 자본과 군사력으로 국가 간 지배 질서가 정해진 것은 근·현대 200년을 포함해 길어도 1000년 정도밖에 안 된다. 나머지 대부분의 시간은 문화와 사상, 기술로 경쟁의 우위가 갈렸다.
우리는 지금 안팎의 불황과 경제위기에 시달리지만, 역설적이게도 문화적으로는 가장 강하고, 값진 시기에 산다는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그런데 이런 겉에 드러난 경쟁력만큼 내부 시스템도 건강하고 선진적일까. 대부분이 인정하듯 우리나라 문화 콘텐츠 수준은 세계 일류급으로 성장했지만, 그 안에 작동하는 제작·배급·유통·소비 구조는 여전히 천박함을 벗어나지 못했다.
영화 배급사는 영화 추천 댓글을 한 개당 2000~3000원에 사들여 추천 순위를 뒤바꾸고, 그 조작된 순위에 이끌려 영화를 본 관객은 갸우뚱한다. 전부는 아니지만 충무로 영화계에 기생하는 음성적 추천시스템이 아직도 작동한다.
음원 시장엔 음악 팬들의 정상적 구매를 왜곡하는 클릭 사재기와 선급 거래가 횡행한다. 특정 음원을 하루종일 틀어놓아 스트리밍 시간을 늘리는 이른바 어뷰징은 음원사이트의 톱10, 톱50 등 순위가 실제 음원구매량과 다르지 않나 의심케 한다.
방송콘텐츠 제작, 출연자들은 아직도 표준계약서는 고사하고 쪽 대본과 밤샘 작업에 하소연할 곳 없이 깊은 `막장`으로 내몰린다. 방송사 독점 구조에 기대 제작비 일부라도 건지려 발버둥치지만 방송사는 시청률을 근거로 제작사와 제작 관계자들을 쥐어짠다. 잊힐 만하면 터지는 유명 PD와 출연자들의 죽음이 이런 구조와 무관할 리 만무하다.
박근혜 대통령은 며칠 전 SNS에 “콘텐츠 창작은 우리 미래를 위해 꼭 필요하다”고 했다.
생각과 이야기를 기초로 만들어내는 무형의 콘텐츠가 진정 우리 사회와 국가 경제를 일으켜 세울 창조산업의 핵심이라고 믿는 철학의 연장선일 게다.
`문화융성`은 덩치만 커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내용적·가치적 성장이 훨씬 더 중요하다. 불공정, 불건전, 윽박, 속박이 개입해서 만들어지는 콘텐츠가 세계 1등은 될 수 있어도 세계인들에게 진정한 감동의 자국은 남길 수 없다. 지금이 아니면 이 기회를 영영 놓칠지 모른다.
이진호기자 jho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