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등은 좋다. 남다른 경쟁력과 실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쉽게 “넌 왜 1등을 못하니”라고 지탄하는 것은 위험하다. 척박한 환경에서 실력을 쌓기 어렵다. 개천에서 용이 날 수도 있지만 그 시기는 짧다. 용이 못된 것을 탓하기 이전 개천을 넓을 바다로 바꾸는 생태계 조성이 우선돼야한다.
“지난 6월 중국 슈퍼컴퓨터 텐허2가 미국 타이탄을 밀어내고 세계 최고 성능 슈퍼컴퓨터로 선정됐습니다. 최고 슈퍼컴퓨터를 확보하기 위한 미국·중국·일본의 선두 전쟁이 눈앞에 펼쳐지면서 몰매를 맞는 건 우리나라죠. 우리 슈퍼컴퓨터의 순위 하락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습니다.”
지난해 말부터 국가 초고성능컴퓨팅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고 있는 조무제 울산과학기술대학교(UNIST) 총장은 이를 “성급하다”고 지적했다. 눈앞에 나타나는 미·중·일 순위 경쟁은 나라별로 슈퍼컴퓨팅 국가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노력의 당연한 결과라는 것이 조 총장 생각이다. 조 총장은 “슈퍼컴퓨팅은 끊임없이 외부 자금이 유입돼 최신 제품을 도입하고 이를 활용해 이뤄지는 소비 중심 산업이 아니다”며 “엄청난 증가 속도로 따라 잡는다고 하더라도 이를 계속 유지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그러나 실제 미·중·일 등 상위 국가는 어떻게 슈퍼컴퓨팅 발전에서 도태되지 않는 것인가. 조 총장은 “관점을 바꿔 우리나라 슈퍼컴퓨팅이 자생력을 갖추고 지속가능한 산업으로 인식돼야 발전 방향을 찾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세계에서는 슈퍼 컴퓨팅을 체계적으로 육성하고 활용하기 위해 국가차원의 법과 정책을 수립했다. 막대한 예산을 투입한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조 총장은 슈퍼컴퓨팅 강국이 우선하는 정책은 “지속성장 가능한 슈퍼컴퓨팅 생태계 육성과 발전”이라고 요약했다. 미국 `XSEDE` `NITRD`, 일본 `SINET4` `HPCI`, 유럽 `PRACE` `DEISA` 등은 국가 차원에서 역할 분담과 상호협력으로 건강한 슈퍼컴퓨팅 생태계를 구축한 사례다. 중국도 유명한 `점·선·면` 정책으로 이미 5곳의 국가센터, 1곳의 시정부센터, 수십곳의 중규모 센터를 구축했다. 각 지역과 특수 분야로 확산하면서 계층적 생태계 구축을 진행 중이다.
“선진국이 슈퍼컴퓨팅에 관심을 쏟는 이유는 IT와 컴퓨터 공학 분야의 첨단 기술의 총아로 산업 발전을 담보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자연과학·공학·금융·통계·영상·문화 산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학문과 산업 분야 기술 발전을 위해 반드시 활용해야하죠. 최근 우리나라도 국가 재난·재해를 해결하기 위한 과학기술에 주목합니다. 지진·해일·방사능 유출 등 국가적 재난재해 대비, 기후변화·에너지·경제전망 등에 필요한 국가 인프라입니다.”
결국은 인프라다. 우리나라도 한때 16개의 슈퍼컴퓨터를 세계 톱 500에 등재시킨 적이 했다. 산·학·연 연구자를 모아 슈퍼컴퓨터에 국산화에 도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 총장이 보기엔 지금 슈퍼컴퓨팅 생태계는 매우 열악한 `개천` 상태다. 그는 “막대한 예산을 투여하더라도 생태계 육성이 이어지지 않으면 단기적 순위를 높인 후 수개월 후 다시 순위권 밖으로 밀려나는 상황이 반복될 것”으로 예상했다.
슈퍼컴퓨팅은 자원이 한정돼 있는 우리나라에서 굴뚝산업과 대량 생산산업을 대체하는 미래 고부가가치 산업이다.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세계적으로 높은 경쟁력을 갖추고 유지할 수 있는 분야기도 하다. 조 총장은 “지금은 순위 경쟁보다 생태계 육성을 논의해야할 시점”이라며 “IT 기술을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우리 사회 역동성을 고려하면 슈퍼컴퓨팅은 한국이 세계를 선도할 수 있는 분야이자 산업이다”고 말했다.
권동준기자 djkwo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