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만 있던 시절 중앙처리장치(CPU) 시장에는 인텔과 AMD가 있었다. 세계 처음 마이크로프로세서를 개발한 인텔은 40년 가까이 PC·서버 프로세서 시장 강자로 군림했다. 이 구도에 균열이 생긴 건 스마트폰 시장이 열리면서다. 유선 위주의 PC CPU와 배터리에서 전력을 공급 받는 모바일 기기의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가 비슷한 기능을 구현하도록 요구받기 시작한 것이다.
상황은 몇 년 안돼 정리됐다. 지난해 TI가 모바일 AP 사업을 접었다. ST에릭슨도 모바일 AP 사업 철수를 발표했다. 이전 인텔이 개발한 모바일용 CPU는 ARM의 저전력 코어프로세서를 사용하는 AP와는 전력 소모량에서 차이가 났다. 인텔 제국의 몰락을 예상하는 관측도 나왔다. 시장조사업체 스트래티지애널리티스(SA)가 발표한 지난해 말 세계 모바일 AP 시장 점유율에 따르면 퀄컴 32%, 삼성전자 27%로, 두 회사가 전 세계 시장 절반을 석권했다.
이 구도가 1년을 넘기지 못하고 깨지는 양상이다. 삼성전자 옥타코어 AP `엑시노스5410`이 발열 문제로 자사 갤럭시S4에도 거의 채택되지 못해 주춤하는 사이 퀄컴의 독주가 시작됐다. 이마저도 오래지 않았다. 상황은 또 변했다. 자회사를 통해 수년 전부터 AP 개발을 해 왔던 중국 업체들은 이제 자체 칩을 채택하거나 중화권의 중·저가 AP 공급사와 협력한다. 인텔도 올해 말 세계 최초로 14나노미터(nm) 공정에서 양산을 시작하며 저전력 AP 경쟁에 본격적으로 나선다.
◇AP를 잡아야 IT를 잡는다
스마트폰 시장 진출이 늦은 LG전자는 스마트폰 개발과 동시에 소규모 인력으로 운영되던 시스템반도체(SiC) 연구소 인력을 대폭 보강했다. 1년 사이 약 10배 규모로 커졌다. 이 팀의 역할은 모바일용 AP 개발이다. 중국 화웨이, ZTE, 레노버 역시 자회사에서 AP를 개발한다. 피처폰 시절 휴대폰 회사들은 시스템 설계만 하고 두뇌 역할을 하는 멀티미디어시그널프로세서(MCP)는 퀄컴, TI 등에서 공급 받았던 것과는 달라졌다. 이유는 AP가 곧 스마트폰 경쟁력으로 이어지는 까닭이다.
모바일 기기에서 AP가 차지하는 역할은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모뎀(베이스밴드) 기술은 물론이고 종전 별도 칩이 담당하던 기능이 AP에 통합되고 있다. 카메라 센서가 인식한 데이터를 처리하는 이미지시그널프로세서(ISP), 낸드플래시메모리 컨트롤러 등 멀티미디어, 메모리 제어 기능이 시스템온칩(SoC)으로 원칩화 됐다. 최근에는 전력관리반도체(PMIC)까지 AP에 통합되는 추세다. PMIC는 프로세서와 달리 로직 반도체가 아닌 아날로그 반도체에 해당한다.
업계 관계자는 “AP가 각종 기능을 점점 내재화 해 결국에는 입출력(I/O)단과 수동 부품, 메모리와 센서 정도만 남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AP는 운용체계(OS)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ARM이나 인텔 등 코어프로세서와 연동돼야 한다. 애플이 시스템을 최적화하기 위해 자체 OS를 쓰고 직접 AP를 설계하는 것도 이런 차원이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윈-텔 동맹을 깨고 ARM 코어프로세서를 지원하는 윈도RT를 출시한 것도 AP와 OS의 상관관계를 잘 보여준다.
스마트폰의 다양한 기능을 제어하는 것도 AP다. AP를 갖고 있으면 부품 구동 원리를 파악할 수 있고 원하는 성능과 기능을 추가하거나 빼는 것도 한결 자유롭다. AP를 장악하면 스마트폰 플랫폼을 장악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스마트폰 시장 포화, AP 춘추전국·합종연횡 앞당긴다
프리미엄 스마트폰 시장이 포화 상태에 이르른 지금, AP 춘추전국시대가 다시 한번 열릴 조짐이다. 대만 미디어텍과 중국 스프레드트럼이 중국 중저가형 스마트폰 시장을 등에 업고 시장 점유율을 점점 늘리고 있다. 락칩, 올위너 등은 지난해까지만 해도 가격 경쟁력만 있는 회사로 인식됐지만 최근에는 듀얼코어 AP까지 내놓고 있다. 화웨이의 자회사인 하이실리콘은 쿼드코어 AP를 개발했다.
프리미엄 모델은 최고 성능의 칩을 발빠르게 출시하는 게 관건이지만 중저가 시장은 진입 전략이 중요하다.
AP·OS·스마트폰 시장을 놓고 복잡한 수싸움도 벌어진다. 지금까지는 ARM 코어프로세서와 리눅스를 기반으로 한 구글 안드로이드 OS간 일명 `리암` 동맹이 모바일 시장을 장악했지만 14nm 이후 저전력 시장에서는 또 다른 양상이 펼쳐질 전망이다. 인텔이 ARM과 대등한 수준의 저전력을 구현할 수 있다면 윈텔 동맹이 다시 살아날 수 있다. 삼성전자는 올해 출시한 스마트패드 `갤럭시탭3 10.1`에 인텔 AP를 사용했다. 인텔·구글·삼성전자의 삼각동맹이다.
반도체 외주생산(파운드리) 업계도 바삐 움직인다. 28나노 이하 파운드리 경쟁을 벌이는 인텔·TSMC·삼성전자는 자사 AP와 외주 물량, 고객사와의 관계를 고려할 수밖에 없다. 스마트폰 시장 경쟁사인 애플은 20나노 AP 파운드리를 삼성전자가 아닌 TSMC에 맡겼다. 미디어텍은 AP 경쟁사인 삼성전자 파운드리는 사용하지 않는다는 방침이다. 퀄컴은 AP 고객사이자 경쟁 관계에 있는 삼성전자 파운드리와 TSMC를 놓고 고민할 수밖에 없다. 파운드리 사업에 진출하는 인텔로서는 애플이 파운드리 고객사이자 AP경쟁사가 될 수 있다.
◇AP 전쟁, 스마트패드·서버 시장에서 재현될 것
포화된 스마트폰 시장에서 가격 경쟁이 불붙고 수익성이 줄어든다면 AP 업체들 역시 신시장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다. 모바일 코어 프로세서 시장 점유율이 90%에 이르는 ARM은 그래픽 프로세서로 이매지네이션, 즉 엔비디아가 주도하던 시장을 넘보고 있다. 고성능·고신뢰성을 요구하는 서버 AP는 고부가가치 분야다. 전통 강자인 인텔과 ARM 진영이 저전력 AP로 다시 한번 힘겨루기에 나서고 있다. 삼성전자는 올해 말 서버용 AP 양산과 더불어 3D 낸드플래시를 생산할 계획이다. AP와 대용량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SSD) 묶음 판매도 가능하다. 내년 이후 대용량 메모리 반도체와 AP 등 시스템반도체를 웨이퍼단에서 적층한 실리콘관통전극(TSV) 기술이 상용화하면 AP와 메모리 업체의 협력도 예상된다.
오은지기자 onz@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