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한 통신사는 차세대 전송장비에 대한 정보제안요청서를 각 장비 업체에 발송했다. 신규 장비 개발과 적용을 국내 중소업체들과 논의하던 이 회사는 2010년 돌연 사업을 연기했다.
2012년 글로벌 업체를 대상으로 다시 진행된 시범 사업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최종 선정이 미뤄지더니 평가에서 하위권에 머문 업체가 공급사로 선정되며 경쟁사로부터 심한 불만을 야기했다.
이 과정에서 수십억원 규모 자금을 투입해 신규 전송장비를 개발하던 국내 중소기업 한 곳은 경영악화로 올해 구조조정을 실시하는 등 심각한 위기를 맞았다.
#SK텔레콤, KT, LG유플러스 등 이동통신3사는 2011년 롱텀에벌루션(LTE)망 구축을 시작하면서 기지국 핵심부품인 RRH(Remote Radio Head)를 국내 업체가 만들 수 있도록 삼성전자, 에릭슨LG, NSN 등 대기업과 국내 중소 무선 업계의 협약을 추진했다.
10여개 중소 업체가 참여했지만 2년 반이 흐른 현재 독자 기술로 RRH를 납품하는 곳은 한 군데에 불과하다.
이 사업에 참여했던 대기업 한 임원은 “기술을 개방했지만 받는 쪽에서 역량이 안됐다”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반면에 중소기업은 측은 “기술 개방 수준이 약했고 투자 규모도 생각보다 컸다”며 불만을 표시했다.
`약골(弱骨)` `약시(弱視)`. 국내 정보통신기술(ICT) 장비 산업을 짓누르는 두 가지 가지 요인이다.
불투명한 수요처의 사업계획, 세계 시장에 비해 뒤떨어진 기술 경쟁력 그리고 중소기업 중심 취약한 생태계 구조가 ICT 장비 산업 미래를 불투명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지목된다.
미국 국가안보국(NSA)의 무차별 도청으로 화두에 오른 통신 주권은 ICT 장비 산업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온갖 공격에 취약한 ICT 장비 특성상 그나마 믿고 쓸 수 있는 것은 `국산`에 한정되기 때문이다.
ICT가 산업 전반으로 확산되고 통신 주권 등 국가적 이슈와 맞물리며 통신장비 산업은 그 어느 때 보다 주목받는다. 세계 시장에서는 화웨이와 시스코가 각각 중국과 미국을 대표해 대리전을 치르는 양상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나라는 손을 놓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 LG유플러스 화웨이 기지국 도입 논란에서 볼 수 있듯이 “미국 것을 쓰느냐 아니면 중국 것을 쓰느냐” 정도의 논의 밖에 진전이 이뤄지지 않는다. 왜 이런 사태가 벌어졌을까?
◇A~Z 솔루션 중 우리나라는 `말단`만 보유
ICT 장비는 크게 유선과 무선으로 나뉜다. 유선은 라우터 등 백본(BackBone)에 위치한 코어 장비와 가장자리에 있는 가입자단 장비로 분류된다.
사람으로 치면 코어 장비는 중추 신경이고 가입자단은 피부다. 둘 다 중요하지만 가입자단 장비는 상대적으로 단순한 결로 설정 역할만 하는 반면에 코어 장비가 위치한 백본에서는 각종 정보를 분류하고 분석하는 복잡한 작업을 수행한다. 코어 장비가 ICT 장비 핵심 경쟁력의 `바로미터`인 셈이다.
국내에 적용된 백본 장비는 100% 외산이다. 미국, 중국 국적을 가리지 않고 설치됐다. 국산 장비가 없기 때문이다.
코어망의 외산 의존도가 100%가 된지는 오래됐다.
이상철 LG유플러스 부회장은 최근 화웨이 기지국 관련 논란이 불거지자 공개석상에서 “이미 이동통신3사가 유선망에서 화웨이 장비를 폭 넓게 쓰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나라도 핵심기술을 아예 보유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삼성전자는 지난 2000년대 초반까지 라우터 관련 기술을 연구하고 상용 제품도 내놨다. 하지만 더 이상 이어지지는 못했다. 상대적으로 경쟁력이 약하고 매출 개선 여지도 휴대폰 등에 비해 낮았기 때문이다.
결국 2000년대 중반을 지나며 삼성전자 내부에는 기지국 등 무선 조직만 남게 되며 자연스럽게 하위 상태계도 경쟁력을 잃어갔다. 같은 기간 중국 화웨이가 전방위로 손을 뻗치며 유·무선을 막론하고 중소 협력사 체계를 구축한 것과 대조적이다.
삼성전자 출신 한 교수는 “무선과 유선을 따로 떼서 접근하면 절름발이가 아니라 기어가는 수준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다”며 “관련 대기업이 필수적인 부분에서만 네트워크 사업을 유지하며 관련 생태계가 모두 위축된 면이 크다”고 지적했다.
◇진화 실패로 불안한 생태계 구조…“언제 무너질지 몰라”
중소기업도 자체 역량으로 강소기업으로 발전하는데 실패했다는 것이 대다수 전문가들의 평이다. 연구개발(R&D) 등 재투자가 적었다는 것이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된다.
2000대 초반에는 IMF 사태 이후 한동안 지속된 초고속인터넷과 이동통신 구축 붐을 타고 업계에 `모럴 헤저드`가 만연했던 것이 큰 이유다. 내실을 다진 일부 기업을 제외하면 대부분 넘쳐나는 단발성 사업에 취해 있었다.
2000년대 중반 이후에는 경쟁이 치열해지며 업계가 R&D에 투자할 여력을 잃어버렸다. 좋았던 시절에 체력을 낭비한 채 살벌한 시대를 준비 없이 맞은 격이다.
글로벌 통신장비 업체 한 임원은 “당시 중계기 등 기존 사업 아이템 수명이 곧 다한다는 이야기가 끊임없이 나왔지만 대부분 업체들이 수주처를 과신하고 R&D를 소홀히 했다”며 “결국 2000년대 후반 도산하는 기업이 나오는 등 직격탄을 맞았다”고 설명했다.
나름의 경쟁력을 갖추고 생존한 회사는 정부나 생태계 구조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가운데 고사 위기에 직면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기존 주력 아이템이었던 말단 장비로는 5년 앞으로 내다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김철수 인제대 교수는 “중계기, 스위치, FTTH 등 가입자 장비로 저개발 국가 시장은 노려볼 수 있겠지만 새로운 성장 동력을 얻기는 힘들 것”이라며 “정부는 업계를 방치할 것이 아니면 종합적인 진단과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시소기자 siso@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