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TV 시청료에 대한 단상

[데스크라인]TV 시청료에 대한 단상

#1. “TV 보면, 시청료를 내야할 것 아닙니까.” “유선방송 요금 내는데 또 무슨 시청료입니까.”

30년 전쯤이다. 어머니와 시청료 징수원은 가끔 말다툼을 벌였다. 옆집도 마찬가지였다. 아예 문을 걸어 잠그고 징수원에게 묵묵부답인 집도 부지기수였다. 얼마 되지 않아 시청료 거부운동이 전국에 들불처럼 번졌다. 곤혹스러워진 정부와 KBS는 묘안을 찾아냈다. 공과금에 시청료를 포함시키는 방안이었다. 시청료가 사실상 `세금`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2. 올해 5월 모처럼 만난 KBS의 L선배는 기분이 좋았다. 연거푸 술잔을 기울이던 그가 “이제 환갑까지는 한 시름 놓았다”라고 말했다. 엊그제 국회에서 정년 연장법이 통과됐기 때문이라고 했다. “요즘 누가 정년을 채우냐”고 반문하자 그의 대답이 가관이었다. “우리 회사는 너무 똑똑해 일찍 사장만 안 되면, 정년을 채우지. 큰 사고만 안치면 말이야. 그래서 요즘 회사 분위기 정말 좋아.”

#3. “선배, 우리 회사엔 `창가족`과 `기둥족`이 있어요.” 몇 해 전 출입처에서 만난 KBS 한 기자가 털어놓았다. “창가족은 아침에 출근하면 전망 좋은 창가에 앉아 신문을 보거나, 낮잠을 자거나 하면서 거의 하루종일 빈둥빈둥 놀아요. 그나마 기둥족이 기둥 옆에 앉아 묵묵히 일하니까 회사가 무너지지는 않는 거에요. 마음만 먹으면 회사 생활 참 편하게 할 수 있는데 말이에요. 하하하…”

#4. “요즘 X팔려서 낯을 못 들고 다녀. tvN `응사(응답하라 1994)`가 시청률 10%를 넘어선다는데, 우린 5% 겨우 넘길까 말까 하니까 말이야.” KBS 한 PD가 며칠 전 나를 보자 마자 자책부터 했다. “KBS가 어쩌다 이 지경까지 됐는지, 참 한심스러워. 케이블 방송에도 밀리고…”

#5. “KBS 이사회가 수신료 인상안을 통과시켰어요. 60%나 올린대요.” 취재기자가 다급하게 전화를 걸어왔다. 잠시 뒤 야당이 날치기라며 반발하고 시민단체도 `시청료 거부운동`을 발표했다는 재보고가 잇따랐다. 30년전 어머니와 징수원이 대문 앞에서 실랑이를 벌이던 장면이 별안간 생각났다. KBS 지인들과 나눈 대화, 그들의 다양한 표정들도 마치 고구마를 캐듯 줄줄이 떠올랐다.

#6. “32년간 한 푼도 못 올렸는데 가능하겠어. 그것도 세금을 60%나 한 번에 올린다면 국민이 납득하겠어. 차라리 조금씩 나눠서 몇 해에 걸쳐 인상하든가 했어야지.” 수신료 인상 발표가 나온 다음날, KBS 제작국 지인은 “이번에도 걸렀다”며 고개를 저었다. 국민이 왜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같으냐고 묻자 그의 대답이 의미심장했다. “진정성 있는 자기반성과 자기개혁이 없기 때문이지. 수신료가 적어 공공성을 못 지킨다고 아우성치면서도 정작 방만한 자기 조직엔 손 하나 못 대잖아.”

#7. KBS 수신료를 화제로 삼던 택시 기사는 미안한 표정으로 뒷자석을 힐끗 쳐다봤다. 앞서 가던 빈 택시가 추위와 사투를 벌이는 승객을 외면한 채 그냥 지나가는 장면을 함께 목격한 터였다. “저러니까, 택시비 인상되는 거 사람들이 반대하는 거 아닙니까. 저도 부끄럽습니다. 맨날 서비스 질 향상을 위해 인상 불가피하다고 해놓고…. 저러니까 사람들이 안 믿죠. KBS 수신료 인상도 매한가지 아닙니까. 시민들이 믿겠습니까. 30년 전이나 똑같잖아요. 케이블 가입 안하면 KBS 볼 수 없잖아요. 그런데 수신료 올려달라고요. 좀 웃기죠….”

장지영 ICT방송산업부장 jyajang@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