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 지식인으로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중국에까지 이름을 떨친 추사 김정희. 그는 역대 명비문 309개를 기억했고, 이들 서체의 장점을 밑바탕으로 끊임없는 연구와 수련으로 독창적인 `추사체`를 창출했다. 칠십평생에 벼루 10개를 밑창내고 붓 1000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추사체를 가리켜 고전으로 들어가 새로운 것으로 나왔다고 하여 `입고출신(入古出新)`이라고 한다.
옛 서체의 모방을 뛰어넘어 추사체라는 명품을 탄생시킨 스토리는 우리 소재부품 산업에 여러 시사점을 준다. 소재부품 세계 4강의 목표는 추사체처럼 창의적이면서도 시장에서 가치를 평가받는 소재부품을 얼마나 많이 개발·생산하느냐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리 소재부품 산업은 지난 2001년 부품소재특별법 제정을 기점으로 국산화 노력과 수출 확대에 힘입어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뤘다. 특별법 제정 당시 620억 달러 수준이었던 수출은 지난해 2630억 달러로 4.2배 성장했다. 흑자는 36배나 늘어나 올해 1000억 달러를 돌파할 것으로 기대된다. 고질적인 문제였던 대일 무역적자와 수입 의존도는 2010년 이후 3년째 하락했다.
하지만 안심하기에는 이르다. 편광판 소재인 폴리비닐알콜(PVA)의 대일수입 의존도가 100%, 액정소재 폴리이미드는 70%에 육박하는 등 첨단 소재부품 분야에서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중국의 추격은 더 무섭다. 대중 무역흑자가 증가하고 있지만 반도체·LCD 등 정보기술(IT) 품목을 중심으로 수입도 크게 늘고 있다.
문제는 수입 증가 원인이다. 과거에는 한국 기업의 중국 현지 생산 탓이 컸으나 최근에는 중국 기업의 경쟁력이 강화된 것이 주된 원인으로 변모하고 있다. 제품 내 중국산 소재부품 비중이 증가하는 이른바 `차이나 인사이드` 현상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는 지난해 말 10대 핵심소재 조기상용화, 소재전용펀드 조성 등을 골자로 3차 소재부품 발전 기본계획을 발표했다. 우리 소재부품 산업의 제2 도약을 위해 매우 의미 있고 시의적절하다고 생각된다.
조선시대 김정희 선생이 입고출신으로 추사체를 만들어냈다면, 우리는 `입융출신(入融出新)`에서 소재부품 산업의 미래 해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융합에 뛰어 들어 명품 소재부품을 창출하자는 것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융합의 관점이 크게 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 `융합을 통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탐구적 관점에서 `어떤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어떤 기술을 융합할 것인가`라는 실용적 관점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변화들이 공통으로 추구하는 바는 소비자 가치 제고이며, 이를 위해 서비스 창출형 융합 소재부품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새롭고 편리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핵심 소재부품을 육성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제는 소재부품 개발자로서의 내 나무만 볼 게 아니라 글로벌 시장의 숲을 봐야 한다. 수요 대기업과 상생하며 공공 연구기관의 기술과 인프라를 적극 활용하는 개방형 혁신 생태계를 키워야 한다.
다른 분야 전문가들과 머리를 맞대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발굴·발전시키며 기술과 기술이 자유롭게 섞일 때 세계가 명품으로 인정하는 융합형 소재부품이 탄생할 수 있다.
소재부품의 완결은 결국 신뢰성이다. 단일기능 검증에서 나아가 융합형 소재부품이 갖는 다양한 기능에 대한 신뢰성 평가체제도 확보해야 한다.
우리는 산업화에 뒤쳐져 척박했던 환경을 딛고 산학연관이 힘을 합쳐 경쟁력 있는 빠른 추격자로 성공했다. 이제는 융합을 통해 시장 선도자로 앞서 나가야 할 때다. 1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의 덫을 하루빨리 벗어나 4만달러 시대를 여는데 소재부품이 핵심 플레이어로 활약해 줄 것을 기대한다.
김경원 전자부품연구원장 kwkvivc@keti.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