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린터 핵심 부품을 생산하는 국내 업체들이 줄줄이 도산 위기에 내몰렸다. 일본 캐논이 특허권을 무기로 장기간 소송전을 펼치면서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기 때문이다. 아직 대법원 확정 판결이 남아 있지만 국산 부품 가격이 폭락했고 고객 이탈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다. 이에 따라 상당수 국내 업체들이 수십억원의 적자를 떠안게 되면서 부도 위기에 처했고 일부 기업은 최후의 선택으로 해외로 공장 이전을 감행하고 있다. 자칫 국산 프린터 부품산업 전체 생태계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지적이다. 무엇보다 정부가 수년간 진행된 소송전에 뒷짐만 지고 있어 업계의 원성이 높다.
17일 업계에 따르면 레이저프린터 핵심 부품인 재활용 감광드럼(OPC드럼)을 생산하는 백산오피씨·알파켐·켐스·네오포토콘·파캔오피씨·아코디스 등은 최근 심각한 영업 적자를 내고 있다. 업계 1위인 백산오피씨는 지난해 영업 손실 60억원을 기록해 전년 대비 4배 이상 적자 폭이 증가했다. 켐스, 파캔오피씨, 아코디스도 각각 30억원, 55억원, 26억원의 영업 적자를 떠안았다. 네오포토콘과 알파켐만이 유일하게 영업 적자를 면했지만 예상 매출액 대비 30% 이상 감소했다. 네오포토콘은 캐논이 특허등록을 하지 않은 방글라데시로 생산 공장을 이전 중이다.
국내 프린터 부품 업계가 이처럼 동시다발적으로 위기에 몰리게 된 배경에는 캐논과의 특허 분쟁이 큰 영향을 끼쳤다. 캐논은 지난 2001년부터 국내 업체들을 상대로 감광드럼에 부착된 삼각기어가 자사의 특허를 침해했다며 특허 침해 소송을 제기했다. 삼각기어는 프린터 카트리지에 감광드럼을 연결하는 일종의 나사다. 감광드럼과 삼각기어의 체결 구조가 동일해 특허 침해에 해당된다는 얘기다.
캐논은 지난 2010년 백산오피씨·알파켐·켐스·네오포토콘 4개사에 순차적으로 특허 침해 소송을 냈고, 현재 특허심팜원과 법원에선 캐논의 특허를 인정하면서 이들 국내 업체에 200억원이 넘는 손해 배상이 청구됐다. 한국무역위원회에선 캐논의 특허가 무효하다고 의견을 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앞서 삼성전자 프린터에 감광드럼을 공급하는 파캔오피씨도 캐논과의 소송에서 패소해 18억원의 손해 배상을 뱉어냈다. 이 회사는 지난해 112억원 매출에 55억원의 영업 적자를 내면서 심각한 경영난을 겪고 있다.
업계는 캐논이 글로벌 프린터 시장에서 국내 업체들의 성장률이 높아지면서 관련 산업을 고사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소송전을 벌이고 있다는 주장이다. 영세한 삼각기어 사출 업체가 아닌 감광드럼 제조업체에 소송을 건 것도 이런 배경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 캐논은 유사 제품을 생산하고 있는 중국과 대만에는 소송을 제기하지 않고 있다. 중국과 대만 법원에서 캐논이 일본 내 감광업체에 소송을 내고 그 판결에 따라 심판에 나서겠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캐논은 결국 자국 업체인 후지전지와 미쓰비시에는 소송을 제기하지 않으면서 중국과 대만에도 소송을 내지 못했다.
소송 중인 한 업체 관계자는 “캐논이 자국 업체들에 소송을 걸지 않은 것은 자국 기업을 보호하기 위한 차원도 있지만 자사 특허가 이미 1986년도에 등록된 선행 특허가 있어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문제는 이런 소송전이 펼쳐지면서 국내 업체들이 글로벌 시장에서 큰 타격을 입었다는 점이다. 세계 시장에서 국내 업체들이 캐논과의 특허 분쟁으로 어려워졌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제품 가격이 대폭 떨어졌다. 가격 인하로 인한 수익 악화는 물론이고 고객 이탈 현상이 심화되면서 업계 전체가 총체적인 위기를 맞았다. 국내 업체들은 생산품의 80% 이상을 수출하고 있다.
업계 한 관계자는 “일본은 물론이고 다른 나라의 선례와 비교할 때 국내 업체들은 상대적인 불이익을 받고 있다”면서 “아직 특허법원 판결에 대한 상고심이 대법원에 계류 중인 만큼 정부나 사법부도 이같은 여론을 감안해야 한다”고 말했다. 캐논은 현재 김앤장을 법률대리인으로 내세워 국내 업체들과 소송전을 펼치고 있다.
국산 주요 감광드럼업체의 지난해 매출 및 영업 손실 현황
성현희기자 sunghh@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