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즘]의리, 으리, 을이

[프리즘]의리, 으리, 을이

‘으리’ 열풍이 식지 않고 있다. 배우 김보성의 주먹구구식 ‘으리론(論)’에서 시작된 ‘으리’는 단순한 코미디 소재를 넘어 사회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4일 치러진 지방선거에서도 ‘으리’는 화제의 키워드였다. 서울시장 선거캠페인에 등장한 ‘약속을 지키으리’ 홍보 포스터부터 경기도지사 후보의 ‘사전투표하~으리!’ SNS 메시지에 이르기까지 ‘으리’는 다양한 모습으로 지방선거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으리’ 열풍의 배경은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 ‘의리(義理)’라는 단어로는 진정한 의리를 표현하기에 부족하다고 생각됐을 수도 있고, 아니면 의리가 실종된 대한민국 사회에서 ‘으리’로 대안을 찾자는 대중의 마음이 반영된 것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마지막까지 배를 지켜야 할 선장이 팬티 바람으로 도망칠 정도로 의리가 땅에 떨어진 세상이기에 나온 현상이 아닐까.

우리나라 산업계에서도 의리는 빛을 잃은 지 오래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약속은 깨지게 마련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 삼성전자 같은 기업에 제품을 납품하는 중소기업은 협력사 다원화 방침 때문에 불시에 구석으로 밀려난다. 구매담당자 말만 믿고 생산량을 늘렸다가 쌓여가는 재고에 한숨소리가 커진다. 의리가 사라진 산업 현장에서 ‘을(乙)이’들은 점점 의욕을 잃어간다.

이 모든 것을 독자적인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을이’ 탓으로 돌리면 상황은 간단히 정리된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을이’가 혼자 힘으로 슈퍼 갑(甲) 대기업과 동등한 위치에 올라서기엔 넘어야 할 벽이 너무나 많다.

지방선거가 끝났지만 당분간 ‘으리’ 열풍은 계속될 듯하다. 아마도 집 나간 의리가 되돌아올 때까지는 계속되지 않을까 싶다. 당선자들은 선거운동 때 내건 공약을 지키고, 산업 현장에서는 대기업이 중소기업과 상생을 추구하는 의리를 보여주면 좋겠다. 김보성씨에겐 미안하지만 그때 ‘으리’ 열풍은 잠잠해질 것이다.

이호준기자 newlevel@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