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분석] 한류 콘텐츠의 뿌리는 이야기다

[이슈분석] 한류 콘텐츠의 뿌리는 이야기다

‘눈의 여왕’과 ‘레미제라블’의 공통점은 원작을 배경한 글로벌 ‘대박’ 영화라는 사실이다. 대박 콘텐츠 뒤에는 언제나 이를 뒷받침하는 이야기(스토리)가 있다. 콘텐츠는 때로 사람의 감성을 흔들어 가슴을 먹먹하게 하고, 때로는 분노하게 한다. 시공간을 초월해 감동을 전하는 이야기가 밑바탕에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산업이란 무대로 끌어올리려는 시도가 한창이다. 정부를 중심으로 이야기산업법을 제정함으로써 이야기를 만드는 작가의 처우를 개선하고 이야기 생태계를 체계화해 성공적인 콘텐츠를 확대 재생산하는 기반을 갖추는 것이 목표다.

◇이야기 뿌리 없으면 ‘별 그대’도 일회성

“눈 오는 날에는 치맥이 딱인데….” 올해 초 국내외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별그대)’에서 천송이(전지현 분)의 대사다. 이 대사는 조류독감의 공포 속에서도 후라이드 치킨을 사기 위해 장사진을 이루는 장면을 중국에서 연출했다. 남녀주인공인 도민준(김수현 분)과 천송이가 여행지에서 함께 먹은 라면 때문에 중국시장에서 국내 신라면의 인기도 더욱 치솟았다.

‘별그대’와 관련된 17만건의 상품이 중국내 최대 인터넷 쇼핑몰인 타오바오(淘寶)에서 거래됐다. 주연 여배우 전지현이 바른 립스틱은 날개 돋친 듯 팔렸다. 전지현이 신었던 신발은 한 켤레에 직장인들의 한 달 월급과 맞먹는 3800위안(약 68만4000원)에 거래됐다. 도민준이 잠들기 전에 읽은 동화책 ‘에드워드 툴레인의 신기한 여행’ 중문판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별그대’ 이후 한류 열풍이 다시 불면서 콘텐츠 산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겨울연가’ 이후 10여년만에 찾아온 바람이라 관심은 더욱 뜨겁다. 하지만 이를 재생산할 수 있는 구조를 우리 사회가 갖췄느냐에 대해서는 콘텐츠 생산자들조차 회의적이다. 국내 콘텐츠 생산의 가치사슬로는 한류를 시스템화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콘텐츠의 뿌리에 해당하는 ‘이야기’와 그 가공에 대한 시스템을 갖추지 않으면 한류는 한낱 신기루에 불과할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콘텐츠 생태계의 뿌리를 키우자

“스토리는 콘텐츠 생산과정의 기획·설계 단계인 전공정에 해당한다. 기획과 설계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잘 만들어진 건물이나 생산품을 기대할 수 없다. 나아가 좋은 이야기가 없으면 한류도 거품에 그칠 수 있다.”

김태원 푸른여름홀딩스 대표는 콘텐츠 생산에서 이야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콘텐츠를 반도체 생산에 비유했다. 영화, 뮤지컬, 드라마, 게임 등 콘텐츠는 인간이 가진 감성과 이성 코드를 자극함으로써 시공간을 초월해 감동을 전달하고 경제적인 부가가치를 만들어낸다. 반도체 칩처럼 콘텐츠 곳곳에는 이야기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뿌리인 이야기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으면 좋은 내용을 전달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콘텐츠 산업 생산 구조를 들여다보면 원작자-시나리오 각색-제작-유통의 과정을 거쳐 최종소비자에게 전달된다. 독자와 시청자는 TV나 스마트폰, 스크린, 무대에 오른 콘텐츠와 스타에 열광한다. 하지만 콘텐츠의 뿌리인 이야기에 관심은 야박하다. 그러나 작가의 생태계가 개선되지 않으면 콘텐츠의 미래 역시 밝지 않다는 분석이다. 여기서 작가란 소설가, 웹툰 작가, 스토리텔러, 감독, PD, 게임 개발자 등이 포함된다.

많은 콘텐츠 생산 전문가들은 국내 콘텐츠 유통단계에서 가장 열악하고 취약한 곳 중 하나가 이야기 생산단계라고 꼽았다. 이 가운데도 수요와 공급간 불일치와 정당한 가치를 받지 못하는 구조를 꼽았다.

김희재 올댓스토리 대표는 “국내에는 지난 2012년 한해에만 5만6000여명의 미래 창작자들이 대학에서 쏟아졌지만 이를 수용할 시스템이나 제도적 기반이 갖춰지지 않았다”고 밝혔다.

김 대표는 최근 문화부 자료를 근거로 들며 “콘텐츠업계 종사자 중 78.8%가 원천 이야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작가들 대부분은 1년여 간 집필한 작품을 편 당 500만원 이하 금액에 판매해 생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밝혔다. 반면에 영화나 드라마 제작자들은 쓸 만한 원작이 없다고 아우성친다. 김 대표는 “작가 중 56.4%는 일년에 한 차례도 작품 판매 전력이 없지만 무명작가 작품 수준이 떨어지는 게 아니라, 시장이 요구하는 형식을 갖추지 않은 것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판매가 이뤄진 이야기라고 해도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는 것은 아니다. 우리 영화는 관객 1억명을 돌파하면서 시장은 커졌지만 원작자나 시나리오 작가에게 꿈의 장소가 아니다. 한 영화 감독은 “국내에서 원작에 대한 고료는 요절한 최고은 작가 사건 이후 3000만원을 넘는 사례가 늘었지만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수익이 보장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작품이 만들어지는 데 수년이 걸리는 데다 작가로선 한꺼번에 이를 받는 게 아니라 제작 단계별로 지급받기 때문이다. 대형 투자사와 제작사의 입김이 세지면서 신진 작가의 발굴은 더욱 기대하기 어렵다. 영화는 그나마 나은 편이라는 지적도 있다. 애니메이션과 다큐멘터리, 뮤지컬, 연극 분야는 이야기의 중요성 대비 가치가 낮아 작가가 겪는 생활고는 더 극심하다.

◇‘기술+인문’ 겸비한 작가 양성도 중요

전문가들은 이야기 콘텐츠의 한류가 지속되기 위해선 이야기 생산과정의 변화도 필요하다고 제시한다.

김태원 푸른여름 대표는 “최근 미국 드라마(미드) 열풍은 체계화된 작가 시스템에서 비롯됐다”며 “체계화된 이야기 생산 구조를 만드는 시스템도 갖춰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잘 짜여진 이야기가 하나의 작가의 생각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점에서 시스템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뉴미디어의 확산과 방송 매체 발달로 콘텐츠 생산이 다양해지면서 콘텐츠 수요가 느는만큼 새로운 이야기 전문가 양성도 장기과제로 꼽았다. 콘텐츠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잘 짜여진 구조가 승부처가 되기 때문이다.

노준석 한국콘텐츠진흥원 연구원은 “창의성이 쉽사리 길러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수한 창의 인력을 길러내는 조기교육도 중요하다”며 “콘텐츠 인력 양성 전문 기관과 창작자의 활동을 지원하는 기금 확충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기술과 인문학 교육의 병행도 과제로 제시했다. 최근 플랫폼의 변화가 내용에도 변화를 요구하는 만큼 이에 맞춘 작가군 양성을 위해서 다학제적인 교육과정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2012년 전문계 고등학교 이상 이야기 관련 창작자 배출 현황

자료 한국저작권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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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한국콘텐츠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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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민기자 km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