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또 하나의 약속

[데스크라인]또 하나의 약속

올해 초 영화감독 김태윤을 만났다. 1991년 처음 만났으니 그럭저럭 25년 가까이 알고 지낸 후배다. 각자 호구지책에 바빠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20대 초반 꽤 가까웠던 덕분에 오랜만에 만나도 어색하지는 않은 사이다.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화제는 김 감독이 연출한 영화 ‘또 하나의 약속’으로 모였다. 반도체 공장 노동자의 죽음을 소재로 한 영화다. 속초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굴지의 대기업 ‘진성전자’에 입사한 ‘윤미’는 2년이 채 지나지 않아 백혈병 판정을 받고 곧 사망한다. 윤미의 작업 환경이 각종 화학약품에 노출돼 있다는 사실을 안 아버지 ‘상구’가 진성전자와 힘겨운 법정 싸움을 벌여나가는 내용이다.

이 영화는 픽션이지만 논픽션에 가깝다. 진성전자는 삼성전자다. 청춘을 채 꽃피우지도 못하고 세상을 달리 한 ‘윤미’와 딸의 억울한 죽음을 알고 눈물겨운 사투를 이어온 ‘상구’는 삼성전자 전 직원 고 황유미씨와 그의 아버지 황상기씨다. 재벌의 위세에 눌려 금기시했던 소재를 다뤘다는 점도 대단하지만 신파로 흐르지 않고 균형을 잃지 않은 김 감독의 연출이 돋보였다.

또 하나의 약속은 주연 배우가 갑자기 출연을 취소하는 등 제작 과정에서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개봉 이후가 더 힘들었다. 국내 시장을 쥐락펴락하는 멀티플렉스 기업은 이 영화를 외면했다. 약속이나 한 듯이 지상파 3사와 내로라하는 신문은 이 영화평을 한 줄도 보도하지 않았지만 입소문이 나면서 관객은 50만에 달했다. 가까스로 200개 남짓의 스크린을 잡아서 한 달 정도 상영한 영화 치고는 대단한 흥행 성적이다.

며칠 전 김 감독을 다시 만났다. 그동안 삼성전자는 권오현 대표가 직접 나와 백혈병과 암으로 사망한 직원에게 사과했다. 보상 의지도 밝혔다. 김 감독에게 “영화라는 콘텐츠의 힘을 새삼 느꼈고 김 감독의 공도 크다”고 덕담을 건넸다. 그는 멋쩍게 웃으면서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답을 돌려줬다.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이 7년 동안 일관되게 주장한 ‘진정성 있는 사과’와 ‘합당한 보상’ 그리고 ‘구체적 재발방지 대책’ 가운데 고작 첫발을 뗐다는 의미로 다가왔다.

다음 달 반올림과 근로복지공단의 산업재해 소송 판결이 난다. 반올림 측이 승소해 산재를 인정받으면 기준에 따른 보험금을 받는다. 지면 한 푼도 없다. 삼성전자가 과거 잘못을 진심으로 사과한다면 소송 결과와 무관하게 보상해야 한다. 가족의 목숨을 돈으로 환산하기는 송구한 일이지만 그래도 사회적으로 납득할 수준이 돼야 한다.

재발 방지 대책은 빛 좋은 개살구로 그치지 말아야 한다. 세계 최대 반도체 기업다운 대안이 나와야 한다. 개인적으로 반도체 생산 라인 노동자의 건강을 연구하고 치료하는 전문 클리닉 설립을 제안한다. 국내 최고 수준이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삼성의료원의 노하우를 공유하면 시작부터 좋은 성과를 내리라 본다.

일각에서는 삼성전자의 사과를 이재용 부회장 경영 승계 작업 중 하나라고 풀이한다. 지난 과오를 털고 새 경영자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포석이라는 말이다. 배경이야 어떻든 후속 실천이 뒤따르지 않으면 삼성전자의 사과는 악어의 눈물이다. 적절한 보상과 재발 방지 대책이라는 ‘또 하나의 약속’을 삼성전자는 내놔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