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단상]새로운 환경, 새로운 혁신전략이 필요하다

[ET단상]새로운 환경, 새로운 혁신전략이 필요하다

얼마 전 기업연구소 3만개 시대 기념행사와 정책토론회에 다녀왔다. 그동안 기업 연구개발(R&D) 성과를 돌아보고 과학기술 선도국 도약을 위한 민간 R&D 지원 정책방향을 모색하는 자리였다.

나는 미국에서 공부하고 HP에서 연구원 생활을 하다 1983년 LG에 입사했다. 당시 우리나라 기업연구소 수는 100여개에 불과했다. 연구소 보유 기업은 거의 대기업이었으며, 대기업도 대부분의 연구개발 활동이 해외제품을 분석해 모방하는 리버스 엔지니어링 수준이었다.

지난 30여년 동안 우리나라 기업들은 기술개발에 꾸준히 투자해왔고, 증가한 기업연구소 수만큼이나 연구개발 인프라 측면에서 고무적인 성장을 지속해 왔다. GDP 대비 기업 R&D 투자 규모는 세계 2위로 성장했고, 상위 2000대 R&D 투자기업 수는 56개로 세계 8위에 이르렀다. 이제 기업연구소는 국가 R&D 투자의 78%, R&D 인력의 69%를 차지할 정도로 성장했다. 이를 바탕으로 반도체, 디스플레이, 스마트폰, 조선 등 주요 산업분야에서 세계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선진국이 기술을 독점하던 분야에서 제품을 수출하는 국가가 됐다.

기업 R&D 인프라의 양적인 성장과 나름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최근 우리나라 산업 경쟁력이 급격하게 하락하고 있어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시간당 노동 생산성이 29.8달러로 OECD 최하위 그룹에 속해 있고, 제조업 경쟁력도 2011년 3위에서 2013년 6위로 하락했다. 지난해 우리나라 500대 기업의 매출은 정체되고 영업이익은 감소했다.

과거에 비해 R&D 투자를 소홀히 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부와 기업의 R&D 투자는 매년 10% 이상 증가했고, 경제규모 대비 R&D 투자는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이다. 더 이상 우리나라가 선진국과 외국기업을 따라잡기 위해 추진했던 전략이 통하지 않는 시대가 됐다는 의미며 앞으로 새로운 변화가 필요하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인재 양성과 확보 측면에서 변화가 시급하다. 최근 들어 중소기업은 물론이고 대기업조차 우수 연구개발 인재 확보에 어려움을 겪는 것이 현실이다. 국내 박사학위 소지자의 소속 기관별 비율을 보면 대학 및 연구기관이 83%, 산업계가 17%다. 산업계 중 중소기업은 4%에 불과하다. 향후 우수한 역량을 보유한 연구 인력이 산업계로도 적극 진출할 수 있도록 제도적인 장치 마련과 정부의 체계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국가 연구개발 투자 및 평가 시스템 변화도 필요하다. 기초·원천기술 분야를 중심으로 국가경쟁력 제고에 기여할 수 있는 기업 활동과 산학협력 프로그램에 투자를 확대하고 새로운 평가제도를 검토해야 한다. 대학 평가도 주로 논문 게재와 같은 학문적 활동을 중심으로 이뤄져 산학협력 활동으로 연계가 매우 미흡한 실정이다.

나아가 정부의 기업 연구개발 지원정책을 정부 주도에서 기업 수요에 기반을 둔 시스템으로 전환해야 한다. 기업이 국가 R&D 과제를 기획·선정·평가하는 주체가 되고, 대학과 출연연 등의 기초연구과제를 선정할 때도 기업 참여를 확대하는 등 산업계 주도의 시스템을 확립해야 한다. 부처별로 따로 운영하는 연구개발사업 관리시스템 통합도 필요하다.

기업지원 성과의 효율성도 높여야 한다. 현재 정부 R&D 지원의 94%는 기술개발에 집중돼 있는데, 개발된 기술의 활용방안이 점점 중요해지는 시대에는 기술 사업화와 이를 위한 기술기획 단계에 대한 지원비중이 보다 확대돼야 한다.

기업연구소 수가 3만개를 넘고 우리나라 연구개발 투자가 세계 6위 수준으로 올라섰지만 R&D 투자가 단순히 투자에 머물지 않고 실제 시장에서 사업성과로 이어지는 혁신 시스템이 더 중요하다. 정부든 기업이든 과거와는 다른, 시장의 수요를 단순히 따라 가는 것이 아닌 시장을 선도하는 새로운 혁신전략이 필요한 이유다.

이희국 산기협 CTO클럽 대표간사(LG 사장) heegook.lee@l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