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정보기술(IT)기업들이 금융시장에 몰려온다. 전통금융사들이 갖추지 못한 첨단 기술력과 커뮤니티로 축적한 거대한 고객층을 내세워 거침없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일각에서는 ‘전통 금융시장의 붕괴’를 알리는 1막1장이 시작됐다는 전망도 나온다. 온라인 전자상거래와 모바일 결제, 나아가 순수 금융업까지 눈독을 들이는 이들 IT기업에 맞설 수 있는 체력을 가진 금융사는 거의 없다.
향후 3년 내 모바일을 필두로 한 전자결제시장은 IT기업 플랫폼에 종속돼 전통적 금융업에만 매몰돼 있는 국내 은행, 카드사들은 ‘갈라파고스(세계 흐름에서 고립되는 현상)’의 늪에 빠질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우려한다. 대한민국 금융시장 지축이 흔들리고 있다.
◇알리페이·페이팔·페이스북·아마존, 지갑을 없애다
국내 은행, 카드사 등 전통 금융사가 이들 IT기업에 긴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간단하다. 통장과 카드, 지갑이 없어도 전자상거래부터 각종 금융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플랫폼과 고객, 네트워크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주목하는 건 고객의 소비트렌드, 이른바 O2O(Online to Offline)시장이다.
예를 들어보자. 기자의 손에 스마트폰이 있다. GPS와 와이파이, 아이비콘(iBeacon) 등 위치를 측정할 수 있는 기술과 지도앱이 내장돼 있다. 언제든지 메시지를 주고받을 수 있는 카카오톡 등의 앱도 이용한다. 온갖 적립쿠폰 카드를 보유하고 있다.
이게 뭘 의미할까? ‘외출할 때 지갑을 들고 나갈 이유가 없다’가 정답이다. 이들 IT기업이 바라는 금융 환경은 신용카드나 통장 없이도 편하게 물건을 구매하고, 이들 고객을 자신의 전자상거래 혹은 구매 플랫폼으로 유입시키는 것을 최종 목적으로 한다. 한국이 공략 대상이 아니라 한국 소비자를 자신의 플랫폼, 혹은 결제가 가능한 온라인 상거래 시장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통장에 잔고만 있으면, 알아서 소비를 떠먹여주는 세상이 이들 IT기업이 그리는 금융시장의 모습이다.
O2O라는 신(新) 소비트렌드는 온라인이나 모바일에서 대금 결제를 한 후, 오프라인(매장)에서 물건을 받는 소비 형태를 뜻한다. 중국 관광객이 명동 부근 면세점에서 물건을 쓸어담는 시대는 지났다. 중국 알리페이를 통해 자신의 집에서 물건을 온라인상에서 고르고, 결제까지 마친 후 롯데백화점 면세점에서 물건만 픽업한다. O2O시대가 열린 것이다. 당연히 결제수수료는 알리페이의 몫이다.
이들 IT기업은 바로 이 온라인 결제 지배력을 바탕으로 오프라인 상점과 나아가 전통 금융사를 종속시키고 싶어 한다. 그들의 최종 목표이기도 하다.
◇3년 후, 먹힐 수도 있다
최근 중국 알리바바그룹 계열사인 알리페이가 한국에 진출했다. 제3자 온라인 결제서비스를 표방하며 KG이니시스와 하나은행 등을 결제 협력사로 끌어들였다. 알리페이는 한국 진출 초기로 한국 기업들과 제휴를 통해 온라인 결제망을 제공하는 단계다.
관련 업계는 알리페이 진출이 온라인 결제 지형도를 바꿀 수 있다며 긴장하고 있다.
알리페이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알리페이는 지난해 기준 제 3자 온라인 결제 시장 48.7%, 전 세계 사용자 수 8억2000명을 확보했다. 사용자 수로는 미국의 결제솔루션업체 페이팔을 넘어선다. 국내에서도 이미 온라인 쇼핑몰에서부터 대한항공 등 항공권 구매 사이트까지 400여 개의 온라인 사이트에서 알리페이 시스템을 도입하고 있다.
국내 카드사는 알리페이의 등장으로 엄청난 기로에 직면했다. 왜일까? 고객 접점을 그동안 카드사가 보유했는데 알리페이 등장으로 한순간 금융서비스 보조사업자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객전도 현상이다.
옥션, G마켓 등 온라인 프로모션의 주도는 그동안 카드사가 도맡았다. 벌이도 쏠쏠했다. 하지만 막강한 자본력과 결제수단, 네트워크망을 바탕으로 카드사는 알리페이의 프로모션에 보조서비스를 담당하는 협력업체로 전락할 수 있다. 알리페이의 국내 서비스를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다.
◇옥션·G마켓 대신 타오바오·아마존
한국은 이들 IT기업에 중간 골목이다. 아시아 고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결제환경이 가장 발달한 한국에서 검증을 하고 싶어 한다. 한국만 끌어들이면 모든 아시아지역을 잠식 할 수 있다는 판단이다.
금융계 전문가들은 이들 IT기업의 가장 큰 경쟁력으로 ‘마켓 플레이스’를 보유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한국 금융사와 IT기업들이 머뭇거릴 때 구글, 아마존, 알리페이 등 해외 IT공룡기업들은 유통사와 결제사를 끌어들이고, 자신들만의 시장을 만들어냈다. 최근에는 결제대행업체(PG), 밴(VAN)사업까지 통합하고 있다.
머지않아 소비자가 국내 온라인 쇼핑몰이 아닌 중국의 타오바오(중국 최대 온라인마켓)에 접속해 즈푸바오(알리페이)로 결제한 후, 무료로 배송받는 시대가 올 것이다. 이미 직구족은 미국 아마존과 일본 라쿠텐으로 지갑을 열기 시작했다.
이들 IT기업이 한국을 겨냥한 이상, 국내 커머스 시장도 다른 국가로 넘어가는 ‘크로스 보더(Cross Border·국제결제사업)’ 서비스로 재편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길재식기자 osolgil@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