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업계가 30년 이래 최악의 불황 터널을 지나고 있다. 지난 6월말 기준 최근 1년간 인력 4000명, 지점 200여개가 사라졌다. 연속 두 분기 실적 호전세에도 ‘바닥을 쳤다’는 안도의 숨을 내쉬긴 이르다. 우호적 금리환경과 구조조정 효과에 나아진 듯 하지만 종사자들은 여전히 밑바닥이라고 입을 모은다. 2012년 4월 이후 박스권에 갇혔던 1일 거래대금은 상반기 4조원 전후를 오가다 8월에는 6조원대로 올랐다. 최경환 경제부총리의 내수·증시 부양 의지에 힘입은 단기적 상승세다. 그럼에도 여전히 증권업 리테일 부문은 적자 한계선에 머무르고 있다. 증권업이 바닥을 찍고 본격적인 회생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보다 실질적인 규제 개혁이 필요하다고 지적되는 이유다.
◇‘변죽’만 울린 규제 개혁…‘위험 중개’ 본질 잃어버린 증권업
“10개 중 2개예요.” 지난 7월 10일 금융위원회의 ‘규제개혁안’ 발표를 앞두고 신제윤 금융위원장이 주재한 간담회에 참석했던 증권사 한 임원은 10개 남짓 안건 중 수용 과제로 2개만 채택됐다고 전했다.
당시 제기된 증권업계 개선안 중 △종합금융투자사의 신용공여 한도 확대 △공모를 통한 분리형 전환사채(BW) 발행은 수렴됐다. 반면에 △증권사 법인지급결제 업무 허용 △대차거래 제도 개선 △외국환 업무 범위 확대 △대체증권거래소(ATS) 시장점유율 규제 완화 △펀드 판매 수수료 및 보수 한도 폐지 △방카슈랑스 규제 완화 △거래 단위 등 장내 파생상품 시장 규제 정상화 △주식워런트증권(ELW) 규제 등 장외파생상품 규제 완화 △증권사 단기자금 조달 원활화 △증권사 예금자 보호제도 개선에 이르는 요구는 반영되지 못했다. 핵심을 우회한 규제개혁이 이어진다는 비판이 나오는 직접적 배경이다.
규제를 보는 입장은 ‘투자자 보호’를 우선시하는 정부와 ‘투자자 확대’가 필요한 증권업계 이견이 상반된다. 전문 투자자 진입만 허용한 파생상품 규제가 대표적이다. 지난 6월 10일 발표된 파생상품 시장 발전방안에 시장 축소의 원인을 제공한 제도에 대한 대안은 포함되지 않아 실망을 안겼다. 2011년 거래량 기준 세계 1위였던 국내 파생상품 경쟁력은 당해 코스피200 옵션 승수(10만원→50만원) 인상 등 몇몇 규제 이후 지난해 9위로 추락했다. 거래량 증가율도 세계 주요 거래소 20개 중 최하위권이다. 호주·미국·영국 등지 거래소가 옵션 승수를 인하한 것과 반대다.
‘투자자 보호’가 필요하다는 정부 규제는 일방향이다. 한국자본시장연구원 관계자는 “개인투자자 참여를 억제하고 코스피200 옵션의 유동성을 다른 시장으로 분산시키겠다는 당초 승수 인상 취지에도 규제 시행 이후 코스피200 옵션 시장이 축소된 것 이외에 다른 어떤 효과도 없었다”고 평가했다.
◇투자자 보호, 어디까지…증권업계 ‘리스크 관리’ 재정립 필요
파생상품시장 위축은 현물시장으로 그 불똥이 튀었다. 규제는 결국 쇠락만 남겼다. 미래에셋증권 관계자는 “위험 상품을 개인 투자자에게 못 판다는 것은 증권사의 위험 중개 기능이 없어졌다는 의미”라며 “투자자 보호도 좋지만 모든 투자자를 보호하는 것은 증권업의 본질을 잃는 것이라 투자자 특성별로 나누는 이원화된 보호 정책도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전문·초보 투자자, 참여·보호를 위한 규제가 구분돼야 한다는 의미다.
증권업의 성장은 개인과 기관이 위험부담에도 투자를 지속한데서 발전해왔다. 정부 당국이 위험상품에 지나친 규제의 잣대를 들이대면서 결국 투자심리를 위축시켜 증권업이 쇠락하게 됐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증권업의 ‘투자자 리스크 관리’ 기조의 근본적 재편 목소리가 커지는 배경이다.
KTB투자증권 관계자는 “증권업의 리스크 관리가 ‘회피’로 잘못 인식됐다”며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의 진정한 ‘관리’ 역량을 성숙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무조건적 규제 대신 위험을 감내하는 투자자 참여를 늘리면서 윤리의 틀을 세운 교육·문화적 변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금융투자협회 관계자는 “개별 회사에서 투자자 보호가 이뤄지면 규제도 풀겠다는 것이 정부의 입장인 만큼 회사별 컴플라이언스 보완 노력도 필요하다”고 부연했다.
제조업과 달리 ‘가치’를 판매하는 서비스업의 태생적 차이를 인식하고 손해를 입힌 금융판매업자가 ‘악’이 되는 문화적 굴레를 넘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증권사 개수 줄이는 ‘통폐합’ 부정적…경쟁 살리고 규모 넓혀야
영업용순자본비율(NCR), 콜 차입 규제 등 중소형 증권사 입지를 위축하는 규제 방향에 대한 점검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높다. 과당경쟁이 증권업 수익률을 낮췄다는 데는 모두가 동의하지만 형평성 있는 경쟁을 해치는 장치가 됐다는 비판이 나온다.
한 대학교수는 “소형 증권사 입지를 좁히는 NCR 산출체계 제도 개편은 정부의 잘못된 판단으로 공정한 경쟁을 제어하는 것일 수 있다”며 “자본시장은 충분히 정보를 제공하면서 영업행위 중심의 규제를 통해 경쟁을 제고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맞다”고 지적했다.
보신주의가 야기한 ‘무늬뿐인 규제’ 혁파 필요성도 제기된다. 예컨대 현행 시장 점유율 5%로 제한된 ATS 제도는 참여 사업자가 수익을 낼 수 없는 구조다.
퇴직연금 등 자본시장 규모를 넓히는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있다. 금투협 관계자는 “시장 규모 자체를 키울 수 있는 더 근본적인 개선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또 “규제에 적응하는 것도 생존전략”이라며 “발표된 안을 토대로 사업기회를 찾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과거 실명확인 위탁 허용이 안됐을 때와 비교해 운신의 폭이 넓어졌다거나 펀드 판매 유연성이 더해진 점 등 활용 여지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표1] 한국 파생상품 거래량 추이
(자료: 한국거래소)
[표2] 파생상품 거래규모(단위: 백만계약, 조 달러, 괄호는 세계 순위)
(자료: 한국거래소)
[표3] 올해 파생상품시장 발전방안으로 도입된 ‘적격 투자자’ 제도
(자료: 한국거래소)
[표4] 금융위원장과 증권사 임원 간담회에서 제기된 개선안 목록과 7.10 규제개혁 수용 여부
유효정기자 hjyou@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