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반도체 강국’이다. 삼성전자를 필두로 반도체 시장에 뛰어든 지 30여년 만에 세계 2위라는 성적을 기록했다. 하지만 시스템반도체 시장에선 존재감이 떨어진다. 반도체 설계 전문 업체(팹리스)와 수탁생산(파운드리) 업체가 손잡고 한국 시스템반도체 산업을 일으켜야 한다는 지적이다.
한국 반도체 산업은 반쪽짜리다. 메모리반도체 시장에선 삼성전자·SK하이닉스가 세계를 장악해 맹위를 떨치고 있으나 시스템반도체 시장에서는 국내 기업을 찾아보기 힘들다.
시장 조사 업체 HIS테크놀로지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의 반도체 판매액은 515억1600만달러로 미국에 이어 2위를(16.2%)을 차지해 13.7%인 일본을 넘어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시스템반도체 시장 점유율은 5%에 불과하다.
시스템반도체는 메모리반도체보다 시장 규모가 4배 이상 크다. 모바일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 와이파이(WiFi) 등 통신 칩, CMOS 이미지센서(CIS)를 포함한 각종 센서류가 대표적이다. 정보를 읽고 쓰기만 하는 메모리와 달리 정보를 활용해 기능을 구현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전자기기에 필수 탑재되는 추세다.
정보통신(IT) 업계의 미래상인 사물인터넷(IoT) 시대로 갈수록 여러 종류의 시스템반도체가 보다 더 많이 필요해진다. 시장 조사 업체 가트너에 따르면 세계 시스템반도체 시장은 지난 2012년 총 매출액 2442억달러 규모에서 오는 2017년 3010억달러로 성장할 전망이다.
시스템반도체 산업의 양대 축은 팹리스와 파운드리다. 팹리스는 우수한 인력을 기반으로 설계능력과 창의성을 결집해 수요 업체가 요구하는 조건에 맞게 칩을 설계한다. 파운드리는 설계자산(IP)을 두루 확보하고 발전시켜 제조 시 제품의 성능을 끌어올리는데 주력한다.
팹리스가 미세 공정과 첨단 기능을 적용한 제품을 시장에 적기에 공급하려면 파운드리 기업과 사전 기술 협력이 필수다. 파운드리 입장에서도 공정 기술을 향상시키기 위해선 다양한 칩을 여러 번 찍어 노하우를 쌓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나 한국 팹리스-파운드리 간 협업은 제대로 되고 있지 않다. 국내 팹리스는 주로 대만 TSMC 등 해외 파운드리에 물량의 대부분을 맡기고 나머지를 국내 업체에 위탁 생산한다. 국내 파운드리 업체 삼성전자·SK하이닉스·동부하이텍에 맡기기엔 부담이 큰 탓이다.
국내 최대 파운드리인 삼성전자는 애플·퀄컴 등 글로벌 업체들이 주 고객사라 중소 팹리스 기업이 이용하기엔 쉽지 않다. SK하이닉스는 파운드리 사업이 주력이 아니다. 동부하이텍은 재무구조 악화와 매각 이슈가 겹치면서 연구개발(R&D)이나 설비투자가 미진한 상황이다. 여기에 세 곳 모두 자체 칩을 만들어 제품군이 겹치거나 기술이 빠져나갈 우려도 있다.
팹리스 업계와 파운드리 업계 모두 협업의 중요성을 알고 있지만 먼저 손을 뻗기는 쉽지 않다.
팹리스 업계는 ‘하루 벌어 하루 산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실적이 부진한 업체가 대다수다. 당장 수요가 있는 제품을 만들어 매출을 올리는 게 최대 목표다. 한 중소 팹리스 업체 사장은 “‘제 코가 석자’라는 말처럼 이런 상황에서 위험 부담을 감당할 수 있는 업체가 몇 없다”고 말했다. 파운드리 업계 관계자는 “고객사가 요구하지 않으니 굳이 나서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고 밝혔다.
하지만 최근 중국이 시스템반도체 산업을 집중 육성하기로 하면서 이대로라면 우리나라는 ‘넛 크래커(선진국에는 기술과 품질 경쟁에서 밀리고 중국, 동남아 등 후발 개도국에는 가격경쟁에서 밀리는 현상)’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때문에 팹리스-파운드리 간 연결 고리를 만들어 위기에 대처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상적인 모습은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압도적 기술력을 자랑하는 삼성전자와 전력반도체 기술로 TSMC와 자웅을 겨루는 동부하이텍 등 주요 파운드리가 가진 IP를 국내 팹리스가 활용, 업계 경쟁력을 확보하는 방안이다. 파운드리도 팹리스가 내놓는 여러 종류의 칩을 생산해 독자 공정 기술력을 쌓아 세계 시장에서의 입지를 다지는 식이다.
시스템반도체 강국인 대만이 비슷한 경우다. 대만은 팹리스와 파운드리가 서로의 지분을 보유하는 민간 교류가 활성화돼 있는데다 국가가 주도적으로 나서 공동 연구개발(R&D)을 지원, 업계 간 소통을 강화해 협업을 도모했다. 그 결과 팹리스와 파운드리가 머리를 맞대 기술을 발전시켜 제품을 개선·개발해 지금의 자리에 올라섰다.
이혁재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 시스템반도체PD는 “중국이 시스템반도체 산업 육성에 나서면서 우리나라 업계가 샌드위치 신세가 될 확률이 높다”며 “팹리스와 파운드리 업체들이 수익성을 떠나 함께 힘을 모아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김주연기자 pillar@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