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32주년 특집3-새로운 도전, 변화] 히든챔피언

몇 달 전 한 조사기관이 삼성과 현대자동차 두 그룹의 매출이 국내총생산(GDP)의 3분의 1에 달한다는 내용을 발표해 화제가 됐다. 삼성과 현대차 그룹은 국내 주식시장에서도 코스피 지수 흐름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우리 경제를 상징하는 대기업 집단이다. 두 그룹의 대표 주자인 삼성전자와 현대차는 세계 정보기술(IT)과 자동차 시장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한국 경제 발전을 이끌었다.

우리 경제가 한단계 더 도약하기 위해서는 세계 일류 기술을 갖춘 전문기업 육성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사진은 국내 한 반도체 기업의 생산 현장.
우리 경제가 한단계 더 도약하기 위해서는 세계 일류 기술을 갖춘 전문기업 육성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사진은 국내 한 반도체 기업의 생산 현장.

하지만 뒤집어보면 우리 경제가 몇몇 대기업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취약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지난 1960~1970년대부터 이어진 성장 일변도 정책에 힘입어 한국이 경제 강국으로 올라서긴 했지만 그 이후 한 단계 더 도약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소수의 대기업 의존도가 높다보니 이들 기업이 조금이라도 흔들리면 국가 경제 전체가 어려움에 빠진다. 과거 몇몇 대기업이 우리 경제를 좌우하던 시대를 접고 기술력으로 무장한 다수의 전문 기업이 선단형으로 대한민국 제조업과 경제를 이끄는 시대로 전환해야 하는 이유다.

우리나라는 과거부터 특유의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 전략으로 산업 발전을 이뤘다. 이른바 ‘아이폰 쇼크’로 휘청거렸던 국내 휴대폰 산업이 수년 만에 스마트폰 시대 적응을 마치고 세계 시장을 재탈환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문제는 이 같은 발전 전략이 종국에는 한계에 직면한다는 점이다. 일단 빠른 추격까지는 성공하지만 그 후 ‘넥스트 마켓’을 이끌어갈 동력을 마련하기 어렵다. 올 들어 스마트폰 시장 성장이 주춤하자 차기 기술 아이템 준비에 소홀했던 스마트폰 업체와 후방 부품 업체들이 실적 부진에 빠진 것처럼 악순환이 되풀이될 공산이 크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부진의 고리를 끊으려면 세계적인 기술력을 갖춘 다양한 중소·중견기업을 길러내는 것이 급선무라고 입을 모은다.

우리나라는 아직 연구개발(R&D) 기술력에서도 선진국 대비 부족한 실정이다. 산업통상자원부가 소재부품·시스템·에너지·창의 네 개 산업군으로 나눠 2012년 기준으로 선진국과의 기술 격차를 분석한 바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미국·유럽·일본에 비해 모든 산업 기술에서 뒤처진 것으로 나타났다. 짧게는 1년에서 길게는 3년가량 선진국과 기술 격차를 보이고 있다.

이들 선진국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기술력을 한 단계 더 높이고자 제조업을 중심으로 다양한 노력을 전개하고 있다. 한때 제조업 이탈로 골머리를 앓았던 미국은 법인세 개편, 첨단 제조 파트너십 구축 등으로 제조업 부활을 이뤄냈다.

일본은 신기술 개발과 신시장 개척을 위한 ‘재흥 전략’을 제시하며 또 한 번의 도약을 도모하고 있다. 유럽은 중소기업 혁신 역량을 키워 산업기술 분야 리더십을 확보하고자 ‘호라이즌(Horizon) 2020’ 전략을 추진 중이다.

기술력 측면에서 한국에 뒤처진 것으로 평가받던 중국도 무서운 속도로 성장했다. 중국 정부는 지난 2011년 수립한 ‘과학기술발전 제12차 5개년 계획’에 바탕을 두고 핵심 기술 개발에 힘썼다. 7대 신흥 산업 육성 전략을 마련해 △에너지 절약 및 환경보호 산업 △차세대 정보기술 △바이오 △첨단 장비제조 △신에너지 △신소재 △신에너지 자동차 분야 기술력을 높여나가고 있다.

우리나라도 최근 ‘제조업 혁신 3.0’ 전략을 수립하는 등 뒤늦게나마 기술력 향상을 위한 새로운 청사진을 그려나가고 있다. 타 산업과 융합한 신 제조업을 창출하고 기존 주력 산업의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기술력을 키워나가는 것이 골자다.

정부 지원과 더불어 기업 스스로의 기술 역량 강화 노력도 요구된다. 대다수의 국내 중소기업은 삼성전자나 현대차 같은 대기업에 의존해 성장했음을 부인하기 힘들다. 세계 시장 공략과 차세대 기술 개발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대기업에 납품할 수 있는 기회를 확보하는 데 모든 역량을 집중했다. 정부가 국내 R&D 투자 상위 1000대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2012년 중소기업의 R&D 투자 증가율은 9.5%로 대기업(13.8%)을 밑돌았다. 지난 수년간 중소기업의 R&D 투자가 꾸준히 늘어났지만 대기업에 비해서는 여전히 모자란 수준이다.

중소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한두 개 대기업에 매출을 전적으로 의존하다보니 해당 대기업이 기술 도입 방향을 전환하면 중소기업은 엄청난 타격을 받는 일이 반복된다”며 “힘들더라도 고객을 다변화하고 세계 시장으로 나갈 수 있는 기술 개발에 힘써야 한다”고 말했다. 중장기적인 시각 아래 기술력 향상 투자를 이어나가고 세계 일류 기술 개발 노력을 지속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기섭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KEIT) 원장은 “중소·중견기업이 ‘히든챔피언’이 되려면 지금과 같이 단순히 대기업 납품에 의존하지 말고 글로벌 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기술력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선진기술 모방에서 벗어나 해외에서 새로운 시장을 창출할 수 있는 도전적이고 창의적인 기술 개발이 필수”라고 당부했다.

이호준기자 newlevel@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