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기획] 기술혁신 동반자로 함께 한 전자신문 32년

“혁신 없이는 기업 이윤도, 경제발전도 없다. 혁신을 하지 않는 자는 기업가가 아니다.”

오스트리아 출신 미국 경제학자 조셉 슘페터가 지난 1912년 발표한 그의 저서 ‘경제발전의 이론’에서 전하는 혁신이 갖는 의미다. 슘페터는 기업 경영에서 혁신의 다섯 가지 유형을 꼽았다. 신제품 생산, 새로운 생산방식 도입, 신시장 개척, 새로운 공급원 개발, 새로운 산업구조가 바로 그것이다.

전자신문은 지난 1982년 9월 22일 `전자시보`란 제호로 첫발을 내디뎠다. 신문 1면에는 전자혁명을 시대를 열겠다는 포부를 담았다.
전자신문은 지난 1982년 9월 22일 `전자시보`란 제호로 첫발을 내디뎠다. 신문 1면에는 전자혁명을 시대를 열겠다는 포부를 담았다.

슘페터의 혁신은 자고나면 새로운 기술이 쏟아지는 글로벌 시대인 오늘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창간 32년을 맞는 본지는 그동안 산업계의 혁신과 변화, 도전과 늘 함께했다. 본지 창간과 함께 ICT 산업이 걸어 온 혁신의 지난날을 짚어봤다.

◇혁신의 전자시대를 열다

1982년 전자신문의 전신인 ‘전자시보’가 탄생할 당시는 전자산업에 신규 대기업의 진출이 본격화된 시기다. 1981년 현대가 새롭게 전자업계에 가세했고 이어 1982년엔 대우가 발을 내디뎠다. 우리나라 전자산업의 혁신 토대가 움틀 무렵이다. 정부로선 전자산업이란 새로운 시장에 진입장벽을 낮추는 것이 필요했다. 1970년대 말 세계에 불어 닥친 오일 쇼크로 세계 경기가 침체되자 각국은 보호무역주의를 채택했고 우리 역시 이에 따른 체질 개선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주간으로 출발한 본지는 창간과 함께 국내는 물론이고 세계 컴퓨터산업, 통신, 사무자동화(OA), 가전, 과학기술 정책 등 기술 산업 관련소식을 집중적으로 전했다. 당시로선 전자·정보통신(ICT)산업은 선진국과 격차가 먼 미지의 산업이었고 뉴스는 산업계에 신선하게 다가갔다.

개인용 컴퓨터(PC) 보급을 통한 정보화시대의 틀도 이때 마련됐다. 1982년에 구미 한국전자기술연구소와 서울대 컴퓨터공학에 있던 중형 컴퓨터가 고유인터넷 주소를 할당받아 아시아 최초로 인터넷을 연결했다. 1983년에 실업계 고등학교에 PC 5000대를 보급했다.

1984년은 PC 운용체계에서 애플의 시대가 가고 마이크로소프트(MS)가 떠오른 무렵이다. 당시 세계 컴퓨터 시장은 IBM PC(5050)가 출시되면서 그때까지 선두를 지키던 애플컴퓨터가 쇠락의 길을 걸었다. 새롭게 출시되는 PC의 OS는 기존 애플이 내장했던 CP/M보다 효율적인 MS-DOS에 눈을 돌렸다. 1984년 국내도 상황은 비슷했다. 당시 국내 컴퓨터 시장은 MS-DOS가 대세였다. 이 때 본지는 보도와 함께 MS-DOS 지침서를 내놨다. 컴퓨터 사용자의 관심은 폭발적이었다.

1987년 본지가 주최한 한국소프트웨어전시회는 소프트웨어산업의 기술 향상을 꾀하는 데 일조했다. 그해 5월 11일부터 닷새간 열린 첫 행사에는 4개국 23개 업체가 650여 소프트웨어를 전시했다. 당시로서는 컴퓨터 하드웨어의 부속품으로만 여겨졌던 SW가 독립적 가치를 인정받은 첫 사례로 꼽힌다.

우리나라가 메모리 반도체 강국으로 발돋움하게 된 계기도 이 때 이뤄졌다. 1983년 12월 삼성반도체통신은 64K D램 개발을 발표했다. 삼성의 64K D램 개발은 국내는 물론이고 세계 반도체 업계를 뒤흔들었다. 미국, 일본 등 선진국과 10년 이상 뒤져있던 우리나라 반도체 기술수준을 4년 이내로 좁힌 일이었다. 이후 삼성은 309개에 달하는 공정개발을 자력으로 성공시켜 웨이퍼를 생산라인에 투입했다. 메모리 시장에서 부동의 1위를 지키는 대학민국 반도체신화의 서막이다.

◇일간시대, 디지털 혁신 준비

전자신문이 일간으로 전환한 1990년은 ICT가 새로운 전환기를 맞은 시대다. 정보화가 국민 생활로 파고들면서 PC 보급이 확대됐다. 가전 분야에선 1991년 7월, 국내 유통시장 개방이 확대되면서 외국업체와 경쟁이 본격화됐다. 우리 업체도 냉장고·세탁기·전자레인지·식기세척기·진공청소기·전기밥솥 등 한국형 가전제품 개발에 착수했다.

초고속 정보통신 기반 구축사업도 전개됐다. 한국이동통신이 1988년 설립된 후 1991년까지 85만명에 그쳤던 무선호출기 사업은 1993년부터 제2무선호출사업자가 각 지역별로 등장하면서 1996년에는 1000만명을 돌파했다. 6년 만에 10배 넘게 성장한 것이다.

호출기로 시작한 무선통신사업은 휴대폰으로 이어졌다. 1980년 말부터 무선통신 열기와 함께 휴대폰 서비스와 제조가 본격화된다. 국내 이동전화시장은 서비스 10년 만에 1998년 1000만명을 넘어선다. 이후 이동전화 보급은 폭발적으로 성장했고 수출도 이어져 반도체와 함께 최대 수출품목으로 자리잡게 된다.

PC의 보급과 통신의 발달은 인터넷 서비스를 촉발시켰다. 1994년 3월부터 한국통신이 기업 연구소로 제한하던 인터넷 서비스를 일반인도 이용할 수 있도록 상용화했다. 이후 1995년부터 인터넷 온라인 사업과 PC 통신은 급속히 성장했다. 1997년 100만명 돌파에 이어 1999년에는 1000만명을 돌파했다.

인터넷 전자상거래와 원자재 조달 유통판매 마케팅까지 영역을 넓혔다. 게임분야에서는 PC 통신과 네트워크 게임 열풍이 일었다. 본지는 대한민국 게임 대상을 신설하면서 국내 게임을 세상에 알리는 가교 역할을 했다. 전자신문은 1996년 4월 20일부터 인터넷 서비스를 개시했다. 인터넷 전자신문은 ICT 산업 전반의 국내외 소식을 사진과 글로 전달하면서 종이매체의 시간적 한계를 극복했다.

1997년 IMF 한파가 불어 닥치면서 많은 기업이 무너졌고 이후 회복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IMF 이후 정부는 신생 벤처를 통한 경제활성화에 초점을 맞췄다. 이후 사회는 인터넷에 대한 가치를 너무 일찍 내다봤다. 주식시장에서 닷컴이란 이름을 붙이면 주가는 몇 갑절로 뛰는 닷컴 열풍이 일었다. 하지만 닷컴 열풍은 오래가지 않았다.

◇닷컴 열풍 이후 혁신 시스템 무뎌져

세계를 휩쓸었던 닷컴 열풍은 2000년대 초반부터 기술 혁신을 가로막는 부메랑이 됐다. 대표적인 사건이 2003년 1월 25일 국내 인터넷서비스 중단 사태다. 슬래머 웜에 감염된 PC가 퍼지면서 인터넷 강국이라는 국민적 자부심을 산산이 무너뜨렸다. 당시 우리나라는 인터넷 인구 2600만명 초고속인터넷 가입 1000만 가구를 넘어서 세계 최고 수준의 인터넷 인프라를 갖췄다는 자부심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이 사건 하나로 우리나라 인터넷의 취약점을 확인하고 정보보호 대책이 얼마나 허술했는지를 드러냈다.

2006년 바다이야기 사태가 몰고 온 파장도 컸다. 전국 성인용 게임장이 사실상 도박공간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바다이야기는 연타(고배당)가 가능해 소위 대박을 노리는 사람들로 붐볐다. 정부가 게임장 경품으로 상품권을 허용하면서 게임으로 얻은 상품권을 현금으로 환전해 게임장은 도박장으로 탈바꿈했다.

정부는 사행성게임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사행성게임을 게임법에서 제외해 특별 단속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이 사태로 정부 정책 신뢰도는 하락하고 정책방향은 진흥보다 규제에 힘을 실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이후 게임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은 2011년 11월 강제적 셧다운제가 시행되는 단초를 만든다. 특히 2008년 2월에 그간 우리나라 ICT 산업의 정책을 주도했던 정보통신부가 해체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렇다고 혁신이 멈춘 것은 아니었다. TV와 모니터 등 디스플레이는 PDP와 LCD를 거쳐 LED로 옷을 갈아입었다. 인터넷의 발달로 콘텐츠의 디지털화가 시작됐고, 속도가 빨라진 인터넷에선 보다 세분화된 영역에서 경쟁이 치열해졌다.

새로운 매체의 탄생도 본격화됐다. 2008년 11월에는 IPTV가 개막했다. 실시간 채널이 포함된 IPTV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IPTV 가입자 수는 빠른 속도로 늘었다. 상용화 이후 1년도 안 된 2009년 10월 100만명을 돌파한 이후 2012년 5월 500만명을 넘어섰다. IPTV 시대로의 진입은 우리나라 방송통신융합서비스가 본궤도에 올랐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우리를 일깨운 잡스의 혁신

2008년 후반 우리가 기술 혁신에 속도를 늦춘 사이 해외에서는 새로운 혁신이 일고 있었다. 바로 아이폰이다. PC 시대를 열었던 애플은 20여년 간 어려움을 겪다가 아이폰으로 새 전기를 찾는다. 기존 휴대폰과 달리 휴대폰에 자유롭게 소트프웨어 프로그램을 설치하는 기능을 채택한 것이다. 아이폰은 2007년에 나왔지만 국내에서 이를 받아들인 것은 2009년에서다. 아이폰이 세계에 퍼지자 후방산업계는 크게 흔들렸다.

아이폰은 우리나라에도 혁신의 의미를 다시 일깨웠다. 국내도 스마트폰 제조와 서비스로 새 전기를 맞았다. 본지 역시 지난 2010년부터 윈도와 아이폰 기반으로 처음 앱을 내놓은 이후 최근에는 누적 다운로드 1000만을 돌파하는 개가를 올렸다.

또 다른 한축은 스마트폰 생태계를 중심으로 새로운 스타탄생을 예고했다. 앱을 통해 신선하고 다양한 서비스가 나왔다. 국내에서도 라인, 카카오톡을 비롯한 스마트폰 메신저 플랫폼을 비롯해 게임, 길 안내 등에서 수만개의 앱이 쏟아졌다.

혁신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스티브 잡스가 지난 2011년 10월 5일 사망한 이후 애플의 신제품마다 의문부호가 붙는다. 혁신이 사라진 모든 기업에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이는 익숙한 것을 늘 파괴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해낸 잡스 같은 혁신가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이경민기자 km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