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삼성전자가 없다.’
정부는 시스템반도체 지원 사업으로 13년간 진행한 ‘시스템IC 2010’과 5년에 걸친 ‘시스템IC 2015’로 약 18년간 기업 육성과 인력 양성에 공을 들였다. 시스템IC 2010으로 국내 시스템반도체 산업 기반을 마련하고 100여개 기업 성장의 초석 역할을 했지만 대만 미디어텍 같은 세계적인 스타 기업은 탄생하지 못했다. 시스템IC 2015 사업으로 실질적인 기업 성장을 유도했지만 세계 30위권에 든 기업은 없다. 일부 분야에서 세계적 기술 경쟁력을 가진 기업들이 생겼지만 전체 산업 경쟁력은 아직 약하다는 평가다.
결과적으로 우리나라 팹리스와 시스템반도체 산업 경쟁력은 대만에 이어 중국에도 밀렸다. 스마트폰 붐을 타고 크게 성장했지만 이 시장이 한계에 부딪히면서 새로운 먹을거리를 준비하지 못한 빈틈이 고스란히 드러난 셈이다.
오랜 기간 반도체 산업을 지원한 정부도 ‘이제 할 만큼 한 것 아니냐’는 분위기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반도체는 중장기 비전을 갖고 지원해야 하는 산업’이라고 입을 모은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세계적인 D램과 낸드플래시 경쟁력을 갖췄지만 아직 시스템반도체 경쟁력은 하위권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사물인터넷(IoT), 웨어러블, 전력반도체 등 새로운 시스템반도체 분야가 떠오르는 만큼 좀 더 적극적이고 전략적인 지원을 강구할 필요가 크다. 잘 하는 분야를 더 잘 하기 위해서, 새롭게 떠오르는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서 지속적인 정부 지원과 산학연 협력이 절실하다는 게 중론이다.
◇시스템IC 2010·2015, 토양 만들고 기업 뿌리 내렸다
시스템IC 2010 사업은 시스템반도체 기초 기술을 확보하고 국내 산업 기반을 다져 생태계를 조성하는데 초점을 맞췄다. 13년간 3단계에 걸친 이 사업은 높은 기술력을 가진 시스템반도체 기업이 다수 탄생하는 데 주효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시스템IC 2010 사업은 1998년부터 2003년까지 반도체 설계의 기반인 설계자산(IP) 위주의 기술개발을 지원했다. 2단계에서는 CMOS 이미지센서(CIS), 디스플레이구동칩(DDI) 등 주변 칩 위주의 제품을 타깃으로 2003년부터 2007년까지 기술 개발에 주력했다. 2007년부터 2011년까지 진행한 3단계 사업에서는 자동차칩, 바이오칩 등 융합칩 중심으로 융합 분야의 기술을 개발했다.
그 결과 LCD 구동칩(LDI), CMOS 이미지센서(CIS), 멀티미디어 칩, DMB 칩, 내비게이션 칩 등 일부 시스템반도체는 세계적 수준의 경쟁력을 갖췄다. 실리콘마이터스, 코아로직, 실리콘화일, 티엘아이 등 관련 기업도 크게 성장했다.
이 사업은 13년간 정부 2476억원, 민간 2319억원으로 총 4795억원을 집행했다. 연간 100여개 기관과 1000명 이상이 참여해 시스템반도체 산업의 기초 기술, 인력, 인프라를 마련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한국반도체산업협회에 따르면 시스템반도체 인력은 1998년 4500명에서 2010년 2만2000명으로 증가했다. 전문 인력이 증가하면서 연구 능력도 높아져 특허 435건, 논문 1477건, 학술발표 2409건 등의 성과를 냈다.
많은 팹리스 기업이 탄생하고 안착하는 계기도 됐다. 실제 팹리스 기업 수는 1998년 46개로 총 생산규모가 12억달러였으나 2005년 100개(37억달러), 2010년 170개(55억달러) 규모로 성장했다.
후속사업으로 진행한 시스템IC 2015 사업은 13년간 닦아온 기반을 토대로 연구개발 해온 기술을 상용화하고 시장 수요를 반영한 원천기술을 확보하는데 방점을 뒀다. 휴대폰, 디지털TV, 자동차를 3개 핵심분야로 삼고 실질적인 성과를 높이도록 기획했다. 2012년 삼성전자가 시스템반도체 부문에 8조원을 투자해 처음으로 메모리 투자 규모를 넘어서는 등 대기업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분위기여서 기대감을 높였다.
하지만 사업 종료를 한 해 남겨놓고 시스템반도체 업계는 위축된 분위기다. 정부의 전폭적 지원을 업고 빠르게 성장한 중국 팹리스 기업이 세계 시장에서 주목받고 있기 때문이다.
스마트폰 분야에 집중한 많은 국내 팹리스 기업이 시장 성장 둔화와 치열해진 경쟁 탓에 한계에 부딪힌 것도 문제다. 삼성전자의 뒤를 잇는 스타 기업의 탄생을 기대했지만 대만의 유수 팹리스 기업과 격차를 좁히지 못하는 등 결과물은 기대 이하다.
최종찬 전자부품연구원 시스템반도체연구본부장은 “정부가 ‘제2의 삼성전자’로 부를만한 스타 팹리스 기업의 탄생을 기대했지만 사업 종료를 1년여 앞둔 현재 국내 팹리스 산업은 되레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며 “오랫동안 지원 사업을 했고 메모리 부문은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만큼 정부는 전체 반도체 산업에 걸쳐 기업이 스스로 생존해야 하는 시장이라고 판단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시들한 정부 의지, 불투명한 후속 전략
사업 종료를 한 해 남겨놓고 시스템반도체 산·학·연은 어떤 후속사업이 필요할지 의견을 모으고 있다. 하지만 예전처럼 5년 이상 중장기 지원 사업을 하는 것은 힘들지 않겠느냐는 불안감이 크다. 산업 환경과 인프라 조성에 13년을 투자했고 이후 상용화까지 뒷받침한 만큼 기존과 다른 방향으로 산업 지원의 필요성을 정부에 촉구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이마저도 쉽지는 않다. 지난 2012년에 5~7년에 걸친 화합물 전력반도체 연구개발 사업을 제안했지만 예비타당성 조사를 통과하지 못했다. 올해 다시 도전장을 냈지만 어떤 결과가 나올지 아직 알 수 없다.
업계와 학계는 애가 탄다. 사물인터넷(IoT), 웨어러블, 자동차 등에서 새로운 시스템반도체 시장 수요가 발생할 것으로 예측되지만 당장 보유한 기술력으로는 부족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기업 수요에 비해 전문 인력이 부족한 것도 문제다. 특히 대기업보다 인력 수급에 어려움을 겪는 팹리스 기업들은 고난이도의 기술을 개발할 전문 인력은 물론 입사 지원자 자체가 부족하다고 토로한다.
시스템반도체 업계와 학계는 크게 4가지 분야에서 후속 사업이 필요한 것으로 본다. △지능형 첨단센서 △전력반도체 △지능형 반도체 △항공·바이오·국방용 반도체를 꼽는다.
유창식 한양대 교수는 “반도체는 첨단기술의 정점인 만큼 정부가 일반적으로 채택하는 5년 단위 사업도 연구가 성과를 거두기에는 짧은 기간”이라며 “정부가 긴 안목을 가지고 계속적으로 투자해야 기업이 세계 시장에서 지속적으로 선두를 지킬 수 있다”고 말했다.
또 “무엇보다 반도체설계지원센터(IDEC) 예산이 줄어드는 등 전문인력 양성에 대한 정부 관심이 줄어드는 것은 큰 문제”라며 “일정 시간이 지나면 국내 반도체 산업에 큰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배옥진기자 withok@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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