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 창업한 모바일 게임업체 A사는 회사 설립 6개월 만에 지분 100%를 중국업체에 넘겼다. 청운의 꿈을 안고 출범한 ‘스타트업’이었지만, 10억원에 달하는 파격적인 조건을 무시할 수 없었다. A사는 곧바로 중국 시장에 내놓을 ‘신작 게임 개발 작업장’으로 전락했다.
‘차이나 머니’가 한국 ICT 산업을 깊숙이 잠식하고 있다. 지금까지 검증받은 메이저 기업에 투자하던 관행과는 다르다. 성장 가능성이 있으면 스타트업 벤처까지 ‘입도선매 식’으로 싹쓸이하고 있다. 일단 여러 기업을 사들이고, 이 가운데 하나만 ‘대박’을 터뜨려도 된다는 식의 공격적인 투자가 유행이다.
김광삼 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는 “언론에 보도된 큰 기업뿐만 아니라 주위에 중국인에게 지분을 넘긴 벤처기업 소식을 종종 듣는다”며 “서너 명의 조그만 스타트업까지 싹쓸이하는 분위기여서 무늬만 한국 기업인 게임사가 급속히 늘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기업의 콘텐츠 분야 투자는 전 방위로 확대됐다. 중국 인터넷 기업 텐센트가 CJ게임즈에 5300억원이란 뭉칫돈을 투자했다. 중국의 드라마·영상 전문 기업 화책미디어그룹은 영화 ‘7번방의 선물’과 ‘변호인’ 배급사로 유명한 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에 535억원을 투자, 지분 15%를 취득해 2대 주주가 됐다. 알리바바도 영화산업 투자를 공언했다.
영화와 게임 분야 컴퓨터 그래픽(CG) 업체 B사는 지난해부터 중국 수주 물량을 30%까지 늘렸다. 국내에서 CG작업은 제값을 받기 어렵지만 오히려 중국 영화사나 게임사는 높은 수익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중국 업체로부터 인수제안까지 받았다. 게임에 이어 한류의 진원지인 영화, 드라마에까지 ‘차이나 머니’가 빠르게 침투하고 있다.
제조업의 뿌리인 부품산업에도 ‘위안화 밀물’이 예고됐다. 대기업 협력 스마트폰 부품업체 C사는 연초부터 인수합병(M&A) 논의가 한창이다. 인수기업은 중국 부품업체다. 부채비율이 높아 다른 기업의 관심대상에서 멀어졌지만 중국기업에는 예외다. 중국업체는 이 회사 투자로 삼성·LG 등 국내 스마트폰 기업에 제품 조달을 노린다는 복안이다.
한국의 간판기업이 중국에 넘어가는 빅딜도 현실화될 조짐이다. 올해만 해도 반도체 업체인 동부하이텍과 팬택 인수전에 중국기업이 가세했다. 차이나 리스크로 위기에 빠진 한국 제조업체들이 아예 경영권을 중국기업에 넘기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이를 반영하듯 중국 자본의 한국 투자 신고금액은 지난 3분기까지 지난해 연간 투자액의 두 배를 훨씬 넘어섰다. 3분기까지 무려 1조원이 넘는 10억3300만달러에 이를 정도다.
중국은 이미 스마트폰, 디스플레이, 가전 등 주요 제조업에서 한국의 턱밑까지 쫓아왔다. 지난달 부산에서 열린 월드IT쇼에 전시된 화웨이 스마트폰은 디자인이나 기술력에서 삼성전자의 스마트폰과 별반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기술장벽을 극복한 중국기업이 낮은 가격으로 빠르게 시장점유율을 늘릴 기세다.
전문가들은 차이나 머니의 한국 ICT 산업 잠식은 가전·휴대폰·부품 등 수출 제조업 시장의 잠식과 또 다른 차원의 ‘차이나 리스크’라고 입을 모았다. 산업 생태계가 뿌리째 중국으로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재홍 한국게임학회장(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은 “요즘 우리나라 게임사 중 60~70%에 달하는 기업이 중국자금을 쓸 정도”라며 “중국에 우리의 게임 콘텐츠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기술력, 개발 노하우가 넘어가는 제2의 쌍용자동차 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단말기 제조업체 한 과장은 “중국의 단말기 업체가 예전 짝퉁이나 생산하던 때와는 달라졌고 기술격차도 없는 듯하다”며 “대규모 자본을 앞세우면 당해낼 재간이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이경민기자 kmlee@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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