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메테우스(Prometheus) 신화는 인간이 갖게 된 기술의 기원에 관한 서구의 대표적인 신화다. 이 신화는 우리 모두 익히 알고 있다. 제우스가 피조물인 인간과 동물에게 능력을 부여하기로 하고, 이 일을 프로메테우스에게 맡긴다. 이런 권능(dunamis)을 부여받은 프로메테우스는 그 일을 자신이 하지 않고, 쌍둥이 동생인 에피메테우스(Epimetheus)에게 넘긴다.
‘먼저(pro) 생각하는 자(metheus)’란 의미의 프로메테우스와 달리 ‘나중에(epi) 생각하는 자’란 의미의 에피메테우스는 깜빡 잊고 인간에게 줄 능력은 남겨놓지 않고 동물들에게 능력 모두를 주고 만다. 이 사정을 전해들은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을 사랑하기에 대장장이 신인 헤파이스토스의 대장간에서 기술, 그리고 그것을 만들 수 있는 불을 훔쳐 인간에게 전해준다. 이를 알게 된 제우스는 화가 나 프로메테우스에게 평생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형벌을 내린다.
이 신화에서 중요한 점은 기술이 인간의 결핍을 (자크 데리다의 용어로 표현하면) ‘대리보충’해주는 것으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태생적으로 디폴트(default)로 결핍의 존재다. 흔히 간과하고 있지만 이 결핍은 근본적으로 에피메테우스의 실수(fault)에서 온 것이다. 그리스어원상 디폴트가 폴트(실수)와 같은 의미인 것도 이 때문이다. 기술은 인간의 원초적인 결핍을 채워주는 것이지 더해주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기술의 기원에 관한 또 다른 신화가 있다. 그리스 신화보다 더 오래된 기원전 2700년경의 고대 수메르 신화가 바로 그것이다. 구어로 전승되다가 점토판에 새겨진 이 신화에 따르면 탐욕과 전쟁의 여신인 이난나(Inanna)는 깊은 바닷속에 사는 지혜의 왕인 엔키(Enki)를 찾아가기로 한다. 그는 기술, 과학, 예술 등 또 다른 문명의 토대가 되는 ‘메(me)’를 가지고 있다. 이난나가 온다는 소식을 들은 엔키는 그녀를 위해 술과 음식을 준비한다. 파티에 흥이 겨워진 둘은 술 마시기 경쟁을 하게 되고, 술에 취한 엔키는 ‘메’를 이난나에게 넘겨준다. 술이 깬 엔키는 전령을 보내 그녀를 되돌아오게 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무사히 돌아온 이난나는 이를 세상에 전한다.
흥미롭게도 이 신화의 이야기는 저명한 사이버펑크 소설가인 닐 스티븐슨(Neal Stephenson)의 ‘스노 크래시’에도 등장한다. 주인공 히루의 여자 친구인 후아니타는 밥 라이프의 작업을 해킹하는데 여기서 후아니타는 엔키에게 ‘메’를 훔친 이난나로 간주된다. 이런 점에서 스티븐슨은 이난나를 최초의 해커로 간주한다.
이 신화의 일반적 해석에 따르면 이난나의 기술은 에피메테우스 실수를 만회해주는 기술과 다르다. 수메르인에게 기술은 동맹을 맺은 다른 나라에서 유입된 또 다른 지식이자 문화일 뿐이다. 즉 프로메테우스의 기술과 달리 이난나의 기술은 각기 다른 세계를 넘나드는 노마드들의 문화적 교역물이다. 이런 점에서 전자가 결핍을 보충해 주는 부정적인 것이라면 후자는 그 무엇이 추가되는 긍정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기술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보충인가 추가인가? 전자라면 인간은 기술 없이 존재할 수 없다. 후자라면 기술은 선택의 대상이 된다. 하루가 멀다 하고 끊임없이 우리에게 제시되는 새로운 기술은 채택을 강요한다. 이런 강박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기술을 따라가야 한다는 조바심에 빠져있다. 우리가 매일 같이 사용하는 스마트폰, 메신저, 이메일 등을 이난나의 ‘메’와 같은 옵션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을까? 기술 문명에 대한 또 다른 인식은 수천 년을 넘어 우리와 공명하며 존재론적 질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재현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leejh@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