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오타쿠, 일본 창조적 기업이 존재하는 이유

서형석 전자자동차산업부 기자
서형석 전자자동차산업부 기자

“의식주와 상관없는 것만 만들고도 저런 환호를 받을 수 있는 건 소니가 ‘오타쿠’이기 때문이다”

최근 만난 일본 전자업계 임원은 히라이 가즈오 소니 CEO의 CES 프레스콘퍼런스 연설을 이렇게 요약했다. 4.9㎜ 두께의 세상에서 가장 얇은 TV, 스마트아이글라스 ‘어태치!’, 하이레졸루션오디오(HRA), 4K 액션캠 등 가정 소비에서 맨 끝 순위만 놓고도 그 어느 전자업계 CEO보다 열렬한 환호를 받았기 때문이다.

축제였다. 전 세계에서 모인 ‘소니 오타쿠’들은 삼성전자의 엄숙함보다 소니의 발랄함과 엉뚱함에 더 큰 환호를 질렀다. 지난해 ‘역대 실패 제품’을 늘어놓았던 히라이 CEO는 이번엔 세밑 국제 사회를 발칵 뒤집었던 문제작 ‘인터뷰’를 꺼내며 객석을 사로잡았다. 모두들 ‘소니’와 ‘히라이 가즈오’라는 브랜드에 반짝였다.

오래도록 소니 오타쿠들이 존재할 수 있던 이유는 소니 자체가 전자산업의 원조 오타쿠 기업이기 때문이다. 삼성전자와 LG전자, 파나소닉 등이 냉장고와 세탁기를 만들 때 소니는 카메라 렌즈를 깎았다. 남들이 값싼 TV를 생각할 때 소니는 값보다 화질 좋은 TV를 생각해 HD와 4K를 세상에 알렸다. 오디오, 카메라 등에서의 독보적 1등은 오타쿠 DNA가 낳은 걸작이다.

지독한 오타쿠 기질이 만든 자만으로 좌절도 맛봤다. 한 수 아래로 여겼던 삼성전자에 TV 왕좌를 뺏겼고, 뒤늦은 스마트폰은 본전도 못 뽑았다. 베타 방식을 고수하다 VHS에 밀렸고 메모리스틱도 SD카드에 무릎을 꿇었다. 히라이의 전임자 하워드 스트링어가 소니를 이끌었던 7년은 ‘박학다식 모범생’과 ‘오타쿠’의 불협화음으로 잃어버린 시간이 됐다.

하지만 오타쿠들은 경험에 강하다. 내 분야에서 만큼은 최고가 돼야 한다는 승부욕도 남다르다. 그것이 소니가 ‘한물갔다’는 한국의 비아냥거림 속에서 소리 없이 카메라 렌즈를 깎고 수백만엔짜리 스피커를 만드는 이유다. 소니는 그 엉뚱함으로 TV, 오디오, 카메라, PC의 ‘뉴 패러다임’을 창조했고 여전히 ‘전 세계인이 설레는 1등 브랜드’다.

실패 경험이 있는 오타쿠의 와신상담은 무서운 법이다.

서형석 전자자동차산업부 기자 hsseo@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