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절박했던 시절에 대한 기억

서형석 전자자동차산업부 기자
서형석 전자자동차산업부 기자

일본 요코하마에 사는 고교 후배는 도쿄에 있는 대학을 오가는 철도노선으로 ‘게이큐(京急)’를 고집한다. 우리의 경인선 격인 이 구간에는 JR히가시니혼, 도큐 등 다른 철도회사 노선도 많지만 게이큐 만의 속도와 안정성이라는 신뢰 때문에 이를 고집한다. 후배뿐만 아니라 많은 요코하마 사람에게 게이큐는 오랜 발이다.

게이큐가 경쟁사들을 압도한 배경으로는 ‘절박함’이 꼽힌다. ‘뒷골목의 초특급’이라는 별명답게 태생부터 불량한 선형으로 속도를 내기 어려운 환경을 가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를 역이용해 차량 성능과 운행 방식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통상 90㎞/h 속도인 통근형 전동차 속도를 120㎞/h로 높였으며 복선 선로만으로도 무려 다섯 가지 등급의 급행을 운행해 물리적 소요시간을 줄였다. 타사가 폭풍우로 운행을 중단할 때도 열차를 운행해 승객 신뢰도 굳건하다.

안전이 중요한 철도에 있어 고난이도 작업이지만 승객이 불편을 느끼지 않도록 게이큐 만의 노하우도 충분히 쌓았다. 게이큐의 일반열차가 승객을 가득 채운 채 경쟁사의 유료 특급을 앞지르는 진풍경이 벌어지는 이유다.

‘절박함의 기적’은 SK하이닉스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5조원대 영업이익으로 최대 실적 기록을 갈아치운 이 회사는 10여년 전만해도 돈이 없어 신규 설비를 마련하지 못했던 비운의 기업이었다. 하지만 구형 장비를 개조해 큰 돈 없이도 신제품을 생산해냈고 이러한 투혼은 글로벌 반도체 치킨게임에서 살아남은 DNA로 꽃피워졌다.

우리는 배부른 시대를 살고 있다. TV 1등, 스마트폰 1등, 반도체 1등의 기억 속에 절박하게 배고팠던 시절은 희미해지고 있다. 하지만 중국은 무섭게 치고 올라오고 일본은 B2B에서 활로를 찾아 부활의 날갯짓을 퍼덕인다. 나락은 금방이다.

다시 절박했던 시절을 이야기하자. 우리에게는 신격호 롯데 총괄회장이 전쟁 중 두 번이나 공장을 폭격으로 잃고도 잠실에 초고층 빌딩을 세우고, 구본무 LG 회장이 반도체를 잃는 아픔 속에서 디스플레이 세계 1등을 거머쥔 역사가 있다. 이 시대에 다시 필요한 것은 ‘절박함’에 대한 기억이다.

서형석 전자자동차산업부 기자 hsseo@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