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분석]물량빼기를 아십니까?

[이슈분석]물량빼기를 아십니까?

“기술금융 실적이 좋지 않으면 금융당국으로부터 질타를 받습니다. 기술기업이 갑자기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실적 맞추려면 ‘물량 빼기(속칭)’를 할 수밖에요.”

기술금융의 폐해를 고스란히 담은 물량 빼기가 시장에 확산되고 있다. 물량 빼기란 정부 기술금융 확대 주문에 편승해 부실기업까지 기술금융에 포함시키고 기술 심사를 속성으로 진행해 달성 목표를 채우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 기술금융 심사대기 기업이 9000건에 육박하면서 아예 은행은 TCB에 물량 빼기용으로 수백개의 심사를 미리 던져 놓는다. TCB도 ‘심사=돈’이라는 인식 탓에 부실 평가가 이뤄지고 결국 좀비기업 양산 회전문으로 기술금융이 악용되고 있다.

실적 맞추기에 급급한 은행권도 담보대출이 가능한 기업을 기술금융 적합 기업으로 둔갑시키는 등 도덕적 해이가 극에 달하고 있다.

한 은행권 관계자는 “TCB에서 심사 수익료를 높이기 위해 기술 평가서를 속성으로 만들거나 제대로 된 기술 평가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아 기술 평가서가 엉터리인 경우가 많다”며 “민간 TCB는 전문 심사인력 부족 등으로 인해 기업 대상 기술 심사 기간이 예전보다 두 배 이상 늘어나는 등 애꿎은 우량 기업들만 피해 보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기술심사를 요청한 한 기업 대표는 “기술 심사 기간에 맞춰 자금 계획을 다 세웠는데 두 달째 심사 결과 연락을 받지 못했다”며 “대기 중인 기업들이 많아 그냥 기다리라는 통보를 받았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그렇다고 제대로 된 기술검증이 이뤄지는 것도 아니다. 실사는 고사하고 평가보고서에는 짜깁기한 내용으로 채워졌다.

기술 평가 자체가 수박 겉핥기 식으로 이뤄진다는 것이다.

TCB의 업무범위는 기술정보의 집중, 가공, 기술정보에 의한 기술평가, 기술등급 인증을 포함해야 한다. 기업 기술의 경제적 가치 추정에 도움이 되는 정보를 기업과 금융회사가 요청하면 TCB가 실사 등을 통해 생성하고 제공하는 게 핵심이다. 하지만 이 같은 과정이 지켜지지 않고 대출을 받기 위한 인증 자료로 기술평가서가 제공되고 있다. 기술정보는 수명이 짧고 정보 생성에 정성적 평가와 면담, 실사가 필수로 수반돼야 한다. 전문평가인력이 실사와 면담, 조사 등을 통해 생성한 평가정보만이 활용가치가 있다.

하지만 현재 은행에 제공되는 기술평가서는 그야말로 ‘종이쪼가리’에 불과하다. 금융당국에 실적 인증 자료로만 활용되고 대부분의 평가서는 잠자고 있다.

한국금융센터 관계자는 “현재의 기술평가 방식은 신용평가와 차별화된 기술평가로서 신뢰성을 갖기 어렵다”며 “기술평가 수준이 향상되지 않은 현 상황에서 무리하게 은행권 대출을 강요하는 형태로 기술금융 확대를 유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길재식기자 osolgil@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