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향후 5년간 30조원을 투자해 ICT 기반 한국형 재난대응 표준 모델을 만든다고 발표했다. 산술적으로만 따지면 매년 6조원에 이르는 많은 돈이다. 새로 취임한 이완구 국무총리가 국민안전에 드라이브를 거는 모습이다. 생명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 당연히 반길 만한 일이다.
그런데 1조7000억원 규모인 국가재난안전통신망(재난망) 예산은 발목이 잡혔다. 26일 열린 차관회의에서 예산안이 빠진 채 보고가 이뤄졌다. 31일 열린 국무회의에서도 예산안 없이 세부추진계획만 통과됐다.
기획재정부는 추가 검토가 필요하다며 예산안은 뺄 것을 주문했다. 국무회의 보고로 재난망 예산이 확정되는 데 부담을 느꼈기 때문이다. 예산확보가 되지 않은 세부추진계획은 실효성이 떨어진 수밖에 없다. 예산액 변동에 따라 사업 형태가 달라질 수도 있다. 기재부가 예산안을 증액할 리는 만무하니 1조7000억원보다 낮아질 공산이 커졌다.
재난망은 재난대응 체계의 뼈대다. 재난 관련 300여 기관 통신망이 따로 놀면 골든타임 확보가 어렵다. 통합 통신망이 없는 상태로 재난대응을 논할 수는 없다. 전문가들은 안전처가 도출한 1조7000억원으로도 전국망 구축이 어렵다고 주장했다. 이보다 예산이 삭감될 경우 산간지역을 비롯해 음영 지역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재난안전에 30조원을 투자한다면서 1조7000억원 확보에 애를 먹는 모습은 이율배반적이다. 재난망은 시급성과 중요성 때문에 예비타당성조사도 면제한 사업이다. 국민 생명은 경제적 논리로 따질 수 없다는 당연한 전제를 기반으로 한다.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확실한 계획을 마련하지 못한 안전처에도 책임은 있다. 면밀한 조사를 통해 예산을 할당하는 것은 기재부의 핵심 책무이기도 하다. 더 받아내고 더 깎으려는 부처 간 줄다리기 속에 ‘국민안전’이라는 사업 목표가 간과돼서는 안 된다.
안호천기자 hcan@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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