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년 전이다. 잘나가던 게임업체 CEO들이 아침 댓바람부터 광화문 한 호텔 식당에 모였다. 김택진 엔씨소프트 사장, 김범수 NHN 사장, 방준혁 넷마블 사장, 손승철 엠게임 사장, 백일승 제이씨엔터테인먼트 부사장 등. 이름만 들어도 얼굴이 그려지는 인물이다. 게임업계 별들이 이렇게 한자리에 모인 것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지 않았나 싶다.
좌담회는 전자신문이 주선했다. 당시 정부가 추진한 ‘온라인게임 사전심의제도’가 한참 논란일 때였다. CEO들은 처음엔 낯을 가렸다. 하지만 동변상련을 느끼는 데 불과 몇 분도 걸리지 않았다. 사전심의 부당성과 홀대 받는 게임산업에 대한 성토가 이어졌다. 업계 맏형 격인 김택진 사장이 기꺼이 아침 밥값도 쏘았다.
그날 이들은 값진 성과물을 만들어냈다. 현재 한국인터넷디지털엔터테인먼트협회의 전신인 한국게임산업협회 발족은 이렇게 시작됐다. 산업과 문화적 가치에 비해 게임 역기능이 너무 부각되던 때였다. 모래알과 같던 게임업계에 구심점이 생기면서 이젠 돌파구가 보일 것 같았다. 현장 기자로서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세월이 흘렀다. 데스크가 된 뒤 지난해 다시 게임을 맡았다. 그런데 시간이 멈춘 것일까. 데자뷔를 경험한다. 게임은 여전히 담배, 마약처럼 ‘사회악’으로 취급 받는다. 게임사가 너무 돈벌이에만 혈안이라는 비판도 여전하다. 셧다운제, 웹보드게임 배팅 제한 등 규제도 끊이지 않는다. 그 사이 달라진 것도 있다. 우려가 현실이 된 것이다. 게임시장은 2013년 처음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텐센트로 대변되는 ‘차이나 머니’는 게임 벤처 지분까지 싹쓸이하고 있다.
무엇이 문제일까. 일단 게임업계 진단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유독 게임만 백안시하는 사회 정서와 강력한 규제가 발목을 잡았다. 여기에 모바일 시장에 너무 느슨하게 대응한 것도 패착이다. 이것만 아니었으면 우리도 ‘슈퍼셀’과 같은 기업이 한두 개는 나왔을 것이다. 출범 4년밖에 안 된 핀란드 모바일 게임업체 슈퍼셀은 지난해 무려 2조원대 매출을 올렸다. 핀란드 정부의 전폭적인 게임산업 육성책과 모바일 퍼스트 전략이 주효했다.
그런데 남 탓만 할 수 있는가. 지난 10여년간 바뀐 게 없다는 걸 뒤집어 보면 그만큼 업계가 무능했다는 말이다. 기회도 많았다. 건전한 놀이 문화로, 한국경제 성장동력으로, 한류 전파의 주역으로 게임산업을 충분히 부각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기회를 살릴 리더십이 없었다. 한국게임산업협회를 만들었지만,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다.
게임업계 이기주의를 대변하는 말이 있다. 바로 ‘은둔 경영’이다. 온라인이든 모바일이든 대박을 터뜨린 CEO는 하나같이 ‘은둔의 경영자’가 된다. 사회와 더 많이 소통해야 할 거물들이 ‘인(人)의 장막’으로 숨어 버린다. 거물은 많지만 리더가 없다. 이런 아이러니가 게임강국을 권불십년(權不十年)으로 전락시켰다.
강신철 전 네오플 대표가 8일 신임 디지털엔터테인먼트협회장으로 취임한다. 새로운 모멘텀이다. 협회 주도로 13년 전 ‘광화문 결의’가 다시 나왔으면 좋겠다. 더 이상 파편화되면 으스러질 수밖에 없다. 이번엔 거물들이 도와야 한다.
장지영 정보통신방송부장 jyajang@etnews.com